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명경지수 62

 

어째서 바쁜가

 

박지수

 

자아 자아, 특히 오늘밤에는 명확한 지도말을 내리니, 어떠한 일이든지 지도말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지도말인가 하면, 나날이 바쁘다, 틈이 없다고 하는데, 어째서 바쁜가. 모두들 찾아온다. 만족시켜 주도록. 만족의 리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지도말씀 1895.10.7. 10)
 
언제나 이 지도말씀을 읽으면 뭔가 찔린 듯 움찔 아프고,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바쁘게 사는 내게 신님께서는 너는 무엇 때문에 바쁜가라고 묻고 계시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구제를 하고 있는가물으시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용재들은 다들 엄청 바쁘다. 한가하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바쁜가?’ 신님은 묻고 계신다. ‘무엇을 하느라고 바쁜가.’ 묻고 계신 것이다.

어버이신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만족시켜 주느라고 바쁩니다. 남을 구제하느라고 바쁜 나날입니다. 남을 돕느라고 바빠요.’ 이겠지.
이 지도말씀을 보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느라 바쁘거나, 자신 혹은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사느라고 바빠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 거다.


나는 바쁘다, 정신없다. 시간없다.”고 말을 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내 삶을 물질적 풍요가 아닌, 시간이나 마음이 여유로운 정신적 풍요, 충만한 삶을 누리며 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늘 바쁜 삶이었다.
무엇 때문에 바빴을까? 생각해 보면 내 만족,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 욕심으로 바빴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이 출세나 입신양명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버이신님께서 위 지도말씀에서 너는 구제 때문에 바빴냐?’고 물으시니 대답이 궁하고 가슴이 꽉 막혔다.

늘 이 길을 위해서 바쁘고, 상급교회 일을 하느라고 바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정말로 바쁘게 만든 건 스스로의 선택, 스스로의 성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바쁘게 살도록 자신을 몰아가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자기만족을 얻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인정받고 싶고,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란 평가도 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한편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정말로 해야 할 일을 안 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뭔가 하기 싫은 것을 부탁받았을 때, “지금, 이거 해야 되는 데요.”하면서 핑계대듯이…….
이 길에서는 포교·구제 전도하는 일이야말로 꼭 해야 할 일이다. 용재라면 누구라도 꼭,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기 싫다거나 혹은 몸에 붙지 않아 피해가려고 하니 늘 다른 일을 핑계 삼아 바쁘다고 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급교회에서 오랫동안 용재 교육을 담당해 오고, 교회보 편집을 담당하거나 이런 저런 일들을 다른 용재들과 함께 해왔다. 용재 교육을 위한 여러 수련회를 거치면서 보람도 많았고, 참가자들의 마음이 용솟음치는 걸 보면서 함께 행복한 시간들도 정말 많았다. ‘어쩌면 수련회 진행 같은 교육 분야가 이 길에서 내 사명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던 일이기도 했다.

교회보 원고를 쓰고, 교회보 편집 일을 하면서 상당 부분 문서전도의 즐거움,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성인시키는 일에 보람과 기쁨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보람과 즐거움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늘 있었다.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그리고 십 년 내내 바빴는데 가만 돌아보니 알맹이가 없는 느낌. 뭔가 늘 바쁘게 하긴 했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때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바쁜 날을 보내고도 저녁에 신님 앞에 엎드리면 뭔가 부족하고 죄송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애써 오늘 하루를 이렇게 잘 지낸 것에 만족하자고 해도 마음에 걸렸다.

연말에 한해를 되돌아보면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해왔구나. 노력하며 살았구나, 수호를 많이 받아 감사하구나싶지만 그래도 조금 허전하고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았다.

이 길은 어버이신님께서 아홉 가지를 가르쳐 놓은 후 마지막 하나를 가르쳐 완성시킨 가르침, ‘구극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 마지막 하나가 으뜸인 리이다. 으뜸인 리는 어버이신님이 우리를 만들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으뜸인 신, 진실한 신님이라는 것과 인간 창조목적과 창조과정 속에 담긴 구제의 원리를 알려주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그 마지막 하나가 앞선 아홉 가지 가르침과 어우러져서 완전한 가르침으로 완성되는 것 아닌가. 그 아홉 가지가 쌓이고, 토대가 돼서 마지막 하나가 빛나고 제대로 서는 것이리라.

 

이 길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신이 가르쳐 온 것을 완성하는 그 마지막 한 가지, 화룡점정이듯이, 내 삶에서 뭔가 허전하게 빠져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인 거리로 나가 전도 구제를 하는 최일선 포교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할 엄두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많았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210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오히려 전도 안하는 대신 다른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다른 일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으로 대치시키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다른 일이 주로 교육이나 히노끼싱, 봉사활동 같은 포교를 지원하는 일들이었고, 집안의 대소사, 동료들 간의 만남 혹은 교류였다. 전도는 아니지만, 일선포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신님일을 한다고 생각했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상급교회도 고성, 원남성교회가 있고, 함안교회나 교구, 전도청도 있다. 월차제도 있고, 부인회도 있고, 일일참배도 있다. 여러 교회의 봉고제나 총회다, 연성회다 이런 저런 일들이 끊이지 않았고, 집안일도 친정 시댁 일이 다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들로 해서 일선 포교의 일이 늘 뒤로 미루어지거나 생략되는 일이 많아 본업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늘 주변에서 그림자처럼 맴돌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래서는 정말 안 되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루 단 5분이라도 전도하자, 하루 단 한 장이라도 전도지를 전하자고 마음먹었다. 오늘까지 550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전도 작정을 실천하면서 느끼는 일은 그 마지막 하나, 늘 뭔가 아쉬웠던 그 무엇이 최일선 포교였음을 진실로 깊이 깨닫게 되었다. 사실 매일 전도를 한다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구제의 성과라곤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구제야말로 용재인 나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일이고, 가장 충만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이고, 매일 신님 앞에 죄송함 없이 엎드릴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신님이 가장 좋아하고 바라시는 일, 전도구제에 충실하지 않아서 항상 뭔가 죄송함이 자리 잡았던 것이었다. 상급교회 참배나 문서전도, 교육, 봉사, 히노끼싱…….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용재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전도구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지 못했고 꾸준히 실천하지도 더욱 못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 가운데 구제활동에 더 마음을 내고 실천했어야 했다고 이제야 깨닫는다.

물론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그리고 전도에 나서기까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내 신앙을 키워주는 바탕이 되고,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일은 시순이 있듯이, 그렇게 여러 일을 하면서 인연이 닦이고, 단단한 신앙의 중심을 조금씩 키워서 드디어 전도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한다는 것 빠를수록 좋아. 서둘러 해 다오. 서둘러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둘러 해야 차질이 없을 것이다. 먼 곳까지 빠짐없이, 늑장을 부려서는 늦어진다. 이 사람에게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길거리에서 만나더라도 전해 다오. 이제부터 이것이 일인 거야. 1907. 4. 7

 

 최근 2년을 뒤돌아보면 여러 가지 일상으로 바빴지만 그런 날에도 어김없이 포교사로서 잠시라도 마음을 내어 전도를 하였다. 그것이 5분이기도 하고, 20분이기도, 두 세 시간이거나 혹은 하루 종일이기도 하였지만 매일 빠짐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니 하루 종일 했던 많은 일들은 기억에 남지 않고, 오로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전도를 이어가려고 애썼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이 그토록 가슴 뿌듯하게 하는 일인 줄 몰랐다. 그런 자신이 기쁘고 대견스러워 충만한 행복으로 일렁거린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어떤 길도, 그 어떤 누구도, 부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