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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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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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58  

세심하게 귀 기울여

      

박지수

 

집에서 혼자 조석 근행을 올릴 때는 늘 전도청 창립 100주년 기념 신악가 CD를 틀어놓고 근행을 올린다. 예전에 혼자 박자목을 치며 근행을 올리다 보면 속도나 음정이나 박자가 제멋대로 되기 일쑤였다. 그런 근행 후에는 근행에 정성이 덜 들어가는 것 같고 근행이 짧다교조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찜찜하였다.

좌근부터 손춤까지 씨디를 틀어놓고 근행을 올린다. 마치 내 곁에 신악가를 불러주는 창인, 악기를 연주해 주는 용재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것처럼 마음 든든하고 용솟음치기까지 한다. 소장님과 둘이서 근행을 올릴 때라도 손춤을 출 때는 꼭 신악가 CD 창인을 초청하여 그 소리에 맞춰 손춤을 올린다. 신악가 CD가 터전에서 제작되고 나서부터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주변에 돌아보면 혼자 근행을 올리는 작은 포교소나 교회가 많다. 그런데 근행의 박자목이 너무 빠르고, 음정도 틀리고, 가락도 제멋대로인 곳이 많은 것 같다. 큰 교회라 해도 신악가 음이 맞지 않고, 속도가 빨랐다 느렸다하고, 악기도 맞지 않아 즐겁지 않는 근행을 보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서로 맞추면 좋을 텐데 저렇게 제멋대로여서 언제 즐거운 근행이 될까 싶다. 저 모습이 여기 이 교회의 현재 모습이고, 이분들 각자의 마음 상태들이 아닐까? 이런 것을 두고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하겠지만 즐겁지 않아 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침울하면 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들 한다. 이게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반대로 용솟음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일까. 특히 33야 기원수련회 때나, 어떤 일로 여럿이 함께 근행을 올릴 때 신악가 CD를 틀어놓고 근행을 올린다. 그런데 고단하여 기운이 없거나 침울할 때는 내 소리가 작아 기준인 신악가 CD 노랫소리가 크게 잘 들리고 그 소리에 의지하여 손춤을 추다 보면 점점 밝아지는 마음을 느낀다.

문제는 즐거움이 넘칠 때 그래서 용솟음치게 신악가를 부를 때이다. 이때는 자신의 노랫소리가 기준 신악가보다 더 크게 나오고 용솟음치는 마음에 기준인 신악가 선율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마냥 달리게 된다. 그러면 반드시 틀리게 된다. 이렇게 틀린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함께 근행을 올리는 곁에 사람들의 마음이 즐겁지 않게 된다.

우리는 신악가를 바로 부르는 훈련을 제대로 한 적이 없고, 음악적 소양도 그다지 갖추지 못했기에 이렇게 어긋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창인을 자주 하면서 훈련이 된 사람조차도 자기 흥에 겨워 신나게 신악가를 부르다 보면 미묘하게 어긋나기 쉽다고 한다.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가다 보면 나중에는 기준음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신악가 소리에도 인연이 묻어나고 스타일이 드러나고 마음의 상태가 담긴다. 그래서 신악가를 부를 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소리가 나게 된다. 특히 용솟음치고 있을 때는 큰 소리로 부르기 때문에 이런 것이 더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기본이 되는 CD를 틀어놓고 함께 근행을 올린다 해도 그야말로 1010색이 된다. 맞추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너무나 당연히 틀린다. 속도도 빠른 사람 느린 사람이 있고, 음정도 제각각이며, 가락도 제멋대로다. 속도를 맞추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하지만 음정과 가락은 정말로 맞추기 힘들다.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즐거운 근행을 올릴 수가 없다.

자기 흥에 겨워 목청껏 부르다보면 음이 올라가 있다. 반면에 몸이 고단하거나 마음이 처질 때는 음도 조금 처지게 된다. 그래서 기준에 제대로 맞추고 있는지 중간 중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에 맞추려는 노력이 정성이고 진실이다. 그 기준이란 곧 신앙의 기준이고, 교조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고, 터전의 소리이므로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침울할 때는 신악가 소리도 작아지니 기준에 맞추려는 마음이 있다면 맞추기는 더 쉽다. 기준음이 상대적으로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행의 신악가에 맞추어 부르다보면 어느 순간 침울한 마음은 정화되어 밝아지게 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용솟음칠 때이다. 이때는 기분에 따라 목청껏 신악가를 부르기 때문에 톤이 올라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자연적으로 기본음보다 음정이 올라가고 노랫가락도 제 멋대로 나오기 십상이다. 자기 흥에 도취해서 기본음을 듣지 않거나 무시하면서 제 잘났다고 내지르는 이상한 음이 난다. 때로는 귀를 막고픈 괴로운 소음으로 들린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괴로워진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즐거움이란 자기 흥에 도취해서 내지르는 그 무엇이 아니다.

지도말씀에

 

지금의 길 각자의 길. 괴로운 자도 있지만 즐거운 자도 있다. 신이 데리고 가는 즐거움과 각자 멋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모두들을 용솟음치게 해야만 참된 즐거움이라 한다. 제 혼자만 즐기고 남을 괴롭혀서는 참된 즐거움이라 할 수 없다. 신이 데리고 가는 즐거움과 각자 멋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멋대로의 즐거움은 지내려 해도 지내지 못한다. 즐거움이란 모두가 용솟음침으로써 참된 즐거움이라 한다. 각자 각자 즐기고, 뒤에 남은 자가 괴로운 식이어서는 진정한 즐거움이라 할 수 없다. 각자 각자 멋대로의 즐거움은 평생 지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린 거야. 1897. 12. 11  

고 했다. 삼가고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깨닫게 해 주는 지도말씀이다.

 

각자 인연 따라 제 멋대로 부르는 이상한 소리, 불협화음이 많이 날 때는 기준음을 높여야 한다. 기준음이 묻혀버리지 않도록 소리를 키운다. 이것이 하나의 포인트다. 그렇지 않으면 기준보다 큰 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끌려가게 된다. 마치 그것이 옳은 것인 양, 기준인 양, 모본인 양 끌려가 버린다. 기준이 바로 서고 거기에 맞추어갈 때 비로소 조화를 이루고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참된 즐거움이 샘솟고, 용솟음치는 근행이 되고, 자유자재한 수호가 내리게 되는 것이리라.

 

결국 우리가 용솟음치면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신의 잣대에 맞는 것일까. 이것을 늘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스스로에 도취되어 아만이나 자만이 강해질 수 있고, 더 쉽게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게 어긋나게 될는지 모르지만 갈수록 크게 어긋나 버리고 만다.

 

그래서 지도말씀에

큰길은 다친다. 좁은 길은 다치지 않는다. 큰길에서 다친다. 좁은 길에서는 다치지 않는다. 좁은 길에서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위태롭다 위태롭다 하는 마음으로 걷기 때문이다.

(1902. 7. 20)

하셨나 보다. 큰 길에서는 안심하고 걷다보니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질 수 있고, 좁은 길에서는 조심, 조심하니까 좀처럼 다치지 않는다.

남이 알아주고 지지해줄 때,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고 용솟음칠 때, 뭔가 큰 깨달음이 와서 즐거울 때, 그리고 일이 잘 돼서 기분이 좋을 때, 이제는 안심이다 하는 마음이 들 때 그 틈으로 자신도 모르게 티끌이 들어온다.

그래서 어버이신님께서는 늘 용솟음치는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시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삼가는 마음 역시 강조하셨다. 삼가는 것이 리야, 삼가는 것이 길이야, 삼가는 것이 세계 제일의 리, 삼가는 것이 한길”(1892. 1. 4.)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기준을 놓치지 말고 바르게 맞추려는 정성으로 나날을 지내라는 게다.

 

이부리 이조선생은 이길에서 가장 으뜸되는 신앙인으로 꼽힌다. 그런 선생에게 교조님은 다음과 같은 큰 가르침을 전해주셨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한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교조전 일화편> 31 하늘의 자

교조님께서는 어느 날 이부리 이조에게

이조 씨, 산에 가서 나무를 한 그루 베어다가 쪽 곧게 기둥을 만들어 봐요.”

라고 하셨다. 이조는 곧 산에 가서 나무 한 그루를 베어 와 쪽 곧은 기둥을 한 개 만들었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이조 씨, 자를 한 번 대봐요.”

하고, 다시 이어서

틈이 없는가요?”

라고 말씀하셨다. 이조가 자를 대봤더니 과연 틈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틈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교조님께서는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쪽 곧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하늘의 자에 대면 모두 어긋나 있는 거야.”

라고 가르쳐 주셨다.

내 주변의 상황은 시시때때로 변하고 다르게 펼쳐진다. 하지만 하늘의 자, 교조님의 모본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 가슴에 단단한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오늘도 정성을 다한다. 어버이신님의 소리가 크게 들릴 수 있도록 내 소리를 낮추고 또 낮추어서 세심하게 더욱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악풍의 리가 섞이지 않도록, 악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악리에 끌리지 않도록 이 세 가지 리, 언제까지나 흔들리지 않도록. (1897.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