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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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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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월차제 신전강화

 

즐거운 삶의 동반자

 

최영철(문산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흐리지만 근행보기에 딱 좋은 날씨를 수호 받았습니다. 멀리서나 가까이에서 많은 분들이 돌아와 주신 가운데 모두가 하나 되어 밝고 용솟음치는 마음으로 방금 6월 월차제를 무사히 즐겁게 마칠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명을 받았기에 잠깐 한 말씀 드리고자 하오니 끝까지 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4)

 

역사의 마디

 

이곳에 앉아 계시는 많은 분들이 나날이 이 길을 위해 그리고 구제 한줄기를 위해 최선을 다 하시느라 참으로 수고가 많으실 줄 알고 있습니다. 연제를 향한 3년 천일의 기간 중 이제 반환점을 훨씬 지나 마지막 해,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는 이때 각자의 주어진 입장에서 구제활동에 여념이 없으실 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순에 부족한 제가 신전강화 담당이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6월은 저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달로 기억에 남는 달입니다. 신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지가 정확하게 오늘이 만 2년이 되는 날입니다. 비록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저의 건강을 걱정하며 이제야 본 얼굴이 돌아왔다. 하며 걱정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받곤 합니다. 정확히 2년 전 620일 이 자리에서 신전강화 당번이라 섰던 것 같은데 생생한 기억은 없습니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아침에 진홍회장에게 제물을 올려달라고 부탁을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신전강화를 했던 것은 기억에 없습니다.

생과 사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하지만, 기억도 없고 아픈 고통도 느끼지 못했기에 내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맞나 할 정도입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마음 졸이면서 꺼져가는 생명을 부여잡고, 어버이신님께 살려달라고 정성을 드린 모습을 얘기로만 듣고 상상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어버이신님께서 삶의 기회를 주신데 대해서는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일이 생긴 후 20일쯤 지났을 무렵부터입니다. 그 때부터 누가 문병을 왔고 하는 것을 조금씩 기억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집사람은 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많은 신경을 쓰고 잔소리 아닌 간섭을 하며 챙깁니다. 때로는 잔소리 같이 들리지만, 모두가 저의 건강을 위해서 걱정하는 말이구나 하고 애교로 봐줍니다.

가뜩이나 마음 약한 사람이 남편이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얘길 듣고 과연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찡할 때가 많습니다. 집사람은 늘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당신을 살리려고 애쓰신 많은 분들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라고요. 제가 거기에 보답하는 것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이렇게 살려주실 때는 주위 사람들의 정성도 있지만 더 큰 뜻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신님 말씀에

산언덕 가시밭 낭떠러지 비탈길도

칼날 같은 험한 길도 헤쳐 나가면 (1-47)

아직도 보이는 불속 깊은 물속을

그것을 지나가면 좁은 길이 보이느니 (1-48)

좁은 길을 차츰차츰 넘어가면 큰길이야

이것이 확실한 본길이니라 (1-49)

라고 했듯이 신한줄기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로를 산언덕이나 비탈길에 비유를 했습니다만, 저도 오늘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숱한 어려움과 좌절도 있었습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헤어 나오기도 힘든 불속, 물속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손을 잡아준 사람, 서로 의지하며 버텨온 집사람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숱한 고생 이겨가며 알뜰히 살림을 꾸려 왔기에 오늘날 문산교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 손잡고 교회 다닐 때를 제외하고, 강습을 받고부터 벌써 3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습 받느라 첫 애기 낳는 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벌써 커서 어느덧 장가를 가서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참 세월은 빠릅니다. 그리고 올해 826일이면 교회장 임명을 받은 지도 만 20년이 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교회장이 되는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온갖 시험을 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를 회상해보면 교회장이 된 것이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하고 채 마무리도 안 된 상태에서 봉고제를 올렸습니다. 그 당시 참으로 많이 어려운 때였습니다. 정신환자 기원 드린 돈 30만원을 가지고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주위에서는 역사를 한다면서 돈도 모아놓지 않고 역사를 한다고 불평도 많이 있었지만, 그 당시 총무 되시는 분이 역사에 책임을 지겠다고 해서 시작된 일인데, 막상 역사를 시작하고 골조공사만 하고 거의 중단하다시피 되어버렸습니다.

애초에 역사문제가 나왔을 때 총무님 생각에는 조그맣게 한 30평 정도를 생각했나봅니다. 자신도 좀 보태고, 작은 형님이 외항선을 타서 돈이 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작은 형님에게 2대를 앉히고 역사기금을 보태게 하면 30평 정도의 역사기금은 충분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당시, 2대 회장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후계자라는 것은 돈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못을 박았습니다. 2대 회장님께 몇 평 정도 하면 될까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동산교회 만큼 하면 될 거다. 30~40평 정도 하면 아담하니 괜찮을 거다.”라고 했는데, 제가 가설계를 그려 보니, 계단도 들어가야겠고, 신찬실도 있어야 하겠기에, 나중에는 56평이 되어버렸습니다. 거기다 2층으로 하니 112평으로 커져버렸습니다.

총무님도 처음에 역사를 도맡아 하겠다고 말한 죄가 있어서 못한다는 소리는 못하고 일을 시작을 했는데, 하다 보니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었는지, 차츰차츰 뜸해지더니 골조공사만 해놓고 두 손을 들어버리는 바람에 참 어렵게 됐습니다.

 

앞도 뒤고 돌아보지 못하고 내달려온 세월

 

일 년이란 세월이 갈 동안 뼈대만 세워놓고 진전이 없으니, 여기저기 자재값 밀린 것, 돈 빌려준 사람, 할 것 없이 빚 독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초대회장님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았지만, 매일같이 혼자서 자시 근행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잠이 들었는데 꿈인가 생시인가 모르게 벼락 치는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 나가보니, 초대회장님이 문 앞에 쓰러져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왜 그러냐고 물을 사이도 없이 등을 몇 번 쳤습니다. 그때 입에서 뭔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피도 좀 토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시 근행을 보고 숟가락으로 배를 긁어먹다가 목에 걸렸던 겁니다.

그 당시 골조 건물 한쪽 벽을 막아서 한 칸을 합판으로 막아 아버지가 먼저 생활을 했고, 우리 내외가 1칸을 막아 생활한 지 이틀 만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 어버이신님께서 우리 부부를 임시 거처로 보내 초대회장님을 살리도록 보내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도 전라도 가서 안 계실 때라 혼자서 그런 일을 당했더라면 꼼짝없이 돌아가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배가 목에 걸려 혼자서 발버둥을 치다 안 되니까 기어서 옆에 자고 있는 우리 쪽 칸에 와서 합판으로 막아놓은 문을 한 번 두들기고 쓰러지셨던 건데, 저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벼락같은 소리로 들렸던 겁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일이었는데, 신님께서 나를 깨워 등을 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등을 친 것도 알고 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습니다.

그 후로 보름정도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간 역사 마무리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겠다 싶어 부부가 의논하여 당신하고 둘이서라도 마무리 하자.’ 하고 신님께 고했습니다. 그 후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받아주셨는지 돈 빌려 주신 사람들도 아무런 독촉도 안 하시고 여기저기서 돈도 빌려 가라고 하시고, 일이 일사천리고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 조카를 포함해서 청년이 두 명 있었는데, 그 둘과 함께 돈 조금 생기면 벽돌 몇 장 사서 올리고 하는 식으로 역사를 조금씩 진행해 나갔습니다.

제가 목수 일은 조금 알아도 다른 일은 잘 몰랐지만, 미장이나 다른 일도 혼자 하는 식으로 해서 80% 정도 마무리가 되어갈 때, 부부가 총무님 집을 찾아가서 급히 서둘러서 봉고제를 올려야겠다고 도와달라고 하니, 그때서야 , 미안하다. 그동안 수고했다면서, 현재 달려있는 커튼이며, 선풍기 등 봉고제를 지낼 준비를 해주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완벽하진 않더라도 봉고제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봉고제를 모시고 난 후 초대회장님은 조금 더 사시다가 출직을 하셨고, 그로 인해 25백만 원이라는 빚을 떠안고 교회장직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역사도 마무리가 덜 된 상태로 봉고제를 올렸기에 마무리 할 때까지 상당히 고생을 했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창문도 홑창에, 보일러까지 넣지 못해 2년이란 세월을 냉방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저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역사도 덜 된 상태에서 봉고제를 올려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대회장님의 출직까지, 또 마음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을 때 지금은 전도청입니다만, 원남성교회 신전역사의 책임을 지고 일을 해야 했고, 연이어 교회장 취임까지 이어져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를 이어받고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옆도 뒤도 돌아볼 사이 없이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사모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교회 살림을 도맡아 하며, 열심히 살아준 집사람 덕분에 오늘날과 같은 즐거운 날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참으로 나를 만나 고생도 많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8개월 동안 서울에서 함께 살다, 제가 강습을 받으러 가게 되어 혼자 교회에 들어와 살았습니다. 그래서 첫 애기 낳는 것도 보지 못했고, 강습을 마치고는 곧바로 고성교회에서 청년근무를 한다고 4년 동안 또 떨어져 살았습니다. 문산교회 역사를 마치고 생긴 빚 때문에 역사 빚을 갚느라 3년 정도 떠돌아다니다보니 또 떨어져 살았습니다. 별난 시어머니 밑에서 어린 나이에 혹독한 시집살이에다가 돈도 못 벌어 주는 남편 시집살이, 교회신자 시집살이 하며, 참으로 눈물로서 세월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저하고도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모처럼 만나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동안 스트레스 쌓인 걸 모처럼 만난 남편한테 풀어놓으면 제가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고 안아줘야 하는데, 저는 저대로 부족불만이 되어 마음이 항상 밖으로 떠돌아서 부부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던 겁니다.

지지고 볶고 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벌써 35년이란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야 조금 인연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서 같이 살까하면 다시는 안 만날 거라고 했는데, 지금은 다시 또 만나 살고 싶다고 하니 안 좋은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신님 수호로 맞이한 며느리

 

아들한테도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릴 때, 많이 떨어져 있다 보니, 아버지하고는 별 추억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는 놀랬습니다.

아들이 과자 같은 군것질을 잘 안 하는 편입니다. 저는 군것질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나는 군것질을 좋아하는데, 왜 너는 좋아하지 않니?” 하고 물어보니, “어릴 때 아버지가 안 사줘서 습관이 안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많이 당황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잘 커줘서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간다고 하니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후계자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도 많은데, 든든한 후계자와 더불어 예쁜 며느리도 맞이해 아버지로써 그리고 교회장으로써의 의무는 다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처음엔 신앙하는 집안끼리 결혼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신앙을 안 하는 아가씨라고 해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참 예쁜 짓을 잘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문산교회 월차제에 참석을 했는데, 근행 보는 모습을 보고 오빠, 나 저기 입고 있는 까만 옷 나도 입으면 안 돼?” 했다기에 그 생각이 고마워서 결혼식도 하기 전인 1월에 터전에서 교복을 맞추고, 4월에 찾아와서, 5월에 입혀서 월차제 근행을 함께 즐겁게 보았습니다. 40분 정도 악기를 가르쳤는데, 틀리지도 않고 즐겁게 근행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돈 되시는 분이 과일가게를 하시는데, 하나를 주문하면, , 셋을 보내주시고 또, 수시로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바람에 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신앙도 안 하시는데 어떻게 아시는지 제사에 쓰는 과일이라고 제일 좋은 것만 써야 한다며 알아서 챙겨주시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신앙을 안 하셔도 참 복 받을 마음씨를 쓰십니다.

 

부부가 한마음 한뜻

 

이제는 집사람도 고생을 안 시키려고 하는데, 아직 인연이 덜 끊어졌는지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연세 많으신 신자 할머니 두 분이 계시는데, 좀 젊은 할머니가 어제 계단에서 넘어졌습니다. 다행히 뼈는 안 다쳤지만 타박상을 입어서 당분간 누워있어야 될 것 같고, 연세 많으신 할머니는 몸이 많이 안 좋습니다. 혼자서 화장실 출입은 하셨는데 그만 넘어져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았지만, 그 이후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십니다. 밥도 먹여줘야 하고, 팔다리도 혼자 못 움직이다보니 일일이 손길이 가야합니다. 몸에 등창이 두 군데나 나서 매일 하루 2번씩 치료도 해야 하고 밥도 떠먹이고 기저귀도 갈고 하다 보면 사오십 분가량 씨름을 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 전에는 밥도 먹고 죽도 잘 먹었는데, 이제 죽도 잘 못 넘깁니다. 등창도 심했는데, 이제 새살도 차고 상태가 많이 좋아졌는데 상처가 아물 즈음 되면 출직하실 것 같습니다.

가족들 보고 전문 병원에 가서 치료도 하고 좋은 곳으로 데려 가라고 했는데, 교회가 편하다고 교회 있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냥 모시기로 했습니다. 한 사람은 옆에 있어야 하는 불편도 있지만, 우리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인연인가 보다 하고 출직 때까지 모시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불편한 때도 있지만, 사시면 얼마나 더 살겠나 싶고, 초대 때부터 신앙한 분인데 우리가 돌봐야지 누가 돌보겠냐 싶기도 하고, 이 일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한 사람 구제한다고 생각해서 즐겁게 돌보고 있습니다. 조금만 고생하면 곧 해방이 되겠지요. 그래도 안 좋은 날보다 즐거운 날이 더 많은 요즘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게 되는 것도 모두가 인연이 있어 만나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 좋은 사람, 좋은 남편, 좋은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어버이신님께서도 사람이 만나짐에도 인연에 따라 만나진다고 하니 좋은 인연의 소유자를 만나려면 좋은 싸앗을 뿌려 혼의 덕을 많이 쌓아야겠죠.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마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그 동안에는 별의별 날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창한 봄날과 같이 희망에 불타는 날이 있기도 하고 장마철의 흐린 날처럼 울며불며 지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 날씨처럼 만물이 익어가는 계절과 같이 풍요로운 때도 있으며, 겨울의 음침한 날과 같이 침묵으로 지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금방 무엇이 좋아졌다고 영원히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괴로운 일이 있다고 영원히 괴로운 날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첫째는 부부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신악가에도

부부가 합심하여 히노끼싱

이것이 첫째가는 근원이 된다 (11-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부가 한마음 한뜻만 되면 가정의 조화도 잘 이루어져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는 이웃과 더 나아가서는 사회 모두가 한마음 한뜻만 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신님의 말씀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융화되면 그 결과가 최선의 것이 아니더라도 신님께서는 그 하나의 마음을 받아들여 수호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뜻을 같이 하여 이루어진 일이라면 비록 틀린 일이라도 신님께서는 허락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국회나 사회 모두가 뒤숭숭합니다. 늘 의견 충돌이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원망과 갈등으로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경제도 어렵습니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모두가 국민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윗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지 않으니, 어버이신님께서 메르스 라는 전염병을 보내셨나 봅니다. 메르스는 진정되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으로 힘들어하고, 경제도 꽁꽁 얼어붙어 걱정스러운 일들 투성이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가야 합니다. 마냥 불평만 해서는 될 일도 안 됩니다. 신앙하는 우리들이라도 우리나라가 신님의 수호를 받아 하루 속히 안정을 찾도록 기원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조130년제는 그냥 연제가 아닌데다 참으로 어려운 시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정신 바짝 차려서 연제 활동의 마지막 한 해 마무리라는 말에 걸맞은 실천을 함으로서 교조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 후회 없이 끝까지 활동했다고 하는 밝은 마음으로 교조 130년제의 당일을 맞이합시다.

남은 기간 용솟음치며 활동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인사에 갈음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