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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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51

 

여덟가지 티끌과 마음청소 38

 

이 시 중

6) 욕심이냐 진실이냐

교조전일화편111 ‘아침에 남이 깨워서 일어나는 것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조님께서는 이부리 요시에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 아침에 남이 깨워서 일어나는 것과 남을 깨우는 것과는 크게 덕, 부덕으로 나누어지는 거야. 남이 모르게 일하는 것과 남을 칭찬하는 것은 정직,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거짓이 되는 거야. ‘좀 더, 좀 더.’ 하면서 일한 다음에 더 일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진실인 거야.”

라고 들려주셨다.

교조님께서는 일한 다음에 좀 더, 좀 더하며 더 일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고 진실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흔히 이라 하면 먹고 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뭔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교조님께서 이라고 하실 때는 다른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것을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일하지 않는 것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도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게으른 일꾼에 대하신 교조님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교조님께서는 게으름을 피우는 일꾼한테 부도덕함을 앞세워 나무라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밥을 먹으려거든 밥값을 해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수고가 많구나.” 하며 부드럽게 대하시고 따스하게 감싸주었습니다. 애정 어린 관심으로 기다려주고 꾸준히 이끌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게으른 일꾼이 스스로 이래서는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일을 하고 싶다,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심정이 되어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의무로써 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린 아이 마음에서 어른의 마음으로 바뀐 것이지요.

그러므로 일을 하기 싫어하고 멀리 하는 것은 인간성이 미숙한 탓이지 나무라거나 억지로 다그칠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기는 아직도 어려서 그렇지 나무라거나 다그칠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자라면 저절로 걷게 됩니다. 그때까지 사랑스런 눈길, 따스한 손길이 필요할 뿐이지 왜 못 걷느냐, 왜 안 걷느냐.’며 따지는 일은 전혀 필요 없는 말입니다.

 

둘째, 일은 보물이라고 합니다.

교조전일화편 29 ‘세 가지 보물에서 교조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기, 정직한 마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가지 중 초점은 에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일을 함에 있어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이야 말로 보물 중에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먹고 사는 것 모두 다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밥을 준비하는 것도 일이고, 세탁하는 것도 일이고, 청소하거나 정원 돌보는 것도 일입니다.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상생활이 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일이 보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일을 하면 마음이 즐겁고, 기쁨이 생겨나고, 용솟음치게 됩니다. 그리고 몸이 건강해집니다. 먹을 것 쓸 것들이 생겨납니다. 한 가지 일에서 두 가지 일로 늘어나고, 오늘 일에서 내일 일로 이어집니다. 생명이 약동하듯이 차츰차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일을 하면 할수록 더 잘 보입니다. 이치가 환해집니다. 통달하게 되고 달인이 되어갑니다. 그러므로 일이야말로 참 보배입니다.

 

셋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수호입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하고자 하나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머리를 몰라서 못 하고, 심신에 결함이 있어 일할 의욕을 잃은 사람도 있고, 일할 자리가 없는 사람,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원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어버이신님께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갖추어주셨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버이신님께서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과 적절한 능력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를 모르고 단지 생활에 쫓기어 돈벌이 수단으로만 일을 한다는 것은 보물을 한낱 썩은 돌처럼 취급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으로 일을 하는 데 어찌 즐거움, 용솟음치는 마음이 생겨나겠습니까?

 

넷째, ‘일은 곁에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보전하기 위해서, 즉 먹고 살기 위해서 불가피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대접받기 위해서 일을 하고, 뭔가 대가를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거나 성공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교조님께서 일이란 남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남을 돕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일이라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 남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 남을 돕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앞세우는 것, 뭔가 바라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교조님이 말씀하시는 일이 아닌 겁니다. 이런 일은 하면 할수록 가정이 파괴되고, 세상에 불안을 증폭하게 됩니다. 안 하느니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조님이 말씀하시는 일은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고, 세상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삶을 이르게 하는 서로돕기도 이런 일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조님이 일러주신 일에 대한 이런 관점들이 일을 더하는 것이 욕심인지 진실인지를 알게 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게으른 일꾼이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이 일어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진실이겠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다, 존중받고 싶다, 이득을 더 얻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 욕심이겠지요.

그리고 일을 보물이라 하셨지만, 일을 할 때 겁이 나도록 부담스럽고, 하면 할수록 즐겁지 않고 골병이 드는 느낌이 든다면 이것은 보물이랄 수도 없지요. 이런 경우에는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진정으로 교조님께서 말씀하신 의미의 일인지 물어보아야 하겠지요. 그에 따라서 일을 더 하는 것이 욕심인지, 덜 하는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자기가 하는 이 일이 욕심인지 진실인지 물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날마다 상급교회 일참이다, 전도다, 집안 대소사다 하며 열심히 다니다가 어느 날 되돌아보니 집 안의 곳곳에 먼지가 쌓이고, 빨래가 쌓이고, 설거지거리가 쌓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만사가 귀찮아지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져보자면 상급교회 일참은 좋은 작정이고, 전도는 용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집안 대소사에 참가하는 것도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왜, 갈수록 피곤하고 지치고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일은 뒤로 미뤄지면서 자기를 짓누르는 짐으로 늘어나는 걸까요. 그렇게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이게 바로 사는 건가? , 힘들구나.’ 하는 때가 오지 않습니까?

피곤하고 지치고 덜 즐거워졌다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이 모자랐든지, 욕심이 끼어들어 무리를 했겠지요. 어딘가 모르게 조금 더하는 진실보다 조금 더하는 욕심이 있지 않았을까요. 더 하게 된 진실에는 지치는 법이 없고 피곤한 법도 없습니다. 그 당시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것입니다. 나에게도 즐겁고 그에게도 즐겁고 모두가 즐거운 것이 진실입니다. 이와 반대로 욕심은 당장은 좋은데 나중이 좋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데 그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쪽은 즐거운데, 다른 쪽은 괴롭습니다.

신악가 5장 다섯에 오래오래 신앙을 하였더라도 즐거움만으로서 가득해야지하고 노래 부릅니다. 이 노래처럼 된다면 신앙을 하면 할수록 즐거움이 많아져야 합니다. 1년 신앙을 했으면 1년 신앙을 한 만큼의 즐거움, 35년 신앙을 했으면 35년 신앙을 한 만큼의 즐거움이, 1020년 신앙을 하였다면 1020년 신앙한 만큼 즐거움이 많아져야 정상입니다.

물론 밤낮이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흐름이 있는 것처럼 긴 삶에서 때때로 마디가 있고 굴곡이야 있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신앙 연수만큼 즐거움이 많아지는 것이 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신앙해도 별 수 없더라 하는 식이 됩니다. 그래서 35년 하다 신앙을 그만두고, 1020년 신앙을 하다가 그만 두고, 당대에 끝이 나는 신앙도 있습니다.

 

진실은 오래오래 가게 하지만 욕심은 불꽃처럼 타 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지게 합니다. 세상만사가 자기 욕심대로 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욕심이 앞서서 한 일은 오래 갈수가 없습니다. 우선에는 할 수 있어도 끝까지 할 수 없습니다.

바람은 1년 사시사철 붑니다. 태풍이든 살랑거리는 미풍이든 언제나 불고 있습니다. 해님도 1년 사시사철 뜨고 집니다. 때때로 비구름에 가려지고, 숲이나 나무, 건물에 가려지기는 해도 일정한 때에 뜨고 집니다. 그런데 바람이나 태양이 피곤하고 지쳐서 불지 못 한다, 뜨지 못 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천연자연은 언제나 한결 같고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대자연의 모습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그냥 그러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연입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물리적으로는 똑같이 주어져 있는 시간입니다. 여기에는 일하는 시간도 있고, 잠자는 시간도 있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8시간 일을 하고, 8시간 잠을 자고, 8시간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 쉽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향이나 체질이나 관심영역이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10시간 일하는 것이 욕심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진실일 수 있습니다.

 

더 하는 것이 욕심일 수도 있고, 덜 하는 것이 욕심일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더 해서 진실일 수도 있지만 덜 해서 진실일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40, 50대에 과로사가 많다고 합니다. 4-50대가 되면 어느 정도 경륜도 쌓이고 겪은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안팎에서 기대도 요구도 많습니다. 그 요구를 다 채워 인정받으려고 애쓰다 보면 일에 매몰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때는 일을 더 한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적절한 선에서 끊을 줄 아는 삼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길에서는 흔히 “‘대물차물에 대한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을 하고, 입이 아프도록 이야기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1000번을 말을 하고, 1000번을 들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가르침이니까 가슴 깊이 새기라는 말이겠지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은 지나친 법이 없고, 욕심이랄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진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뭔가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단 한 번을 말해도 그 순간 바로 욕심이 되겠지요. 그리고 상대가 준비되지 않는 상태, 마음을 열지 않는 상태에서 한 마디 더 말하는 것도 욕심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줄 때도 적당한 선이 있게 마련입니다. 물이 부족할 때 한 모금 더, 한 모금 더하는 것은 생명수가 되겠지만 이미 물이 넉넉할 때 한 모금 더, 한 모금 더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썩게 합니다.

, 교육, 그리고 식물을 키울 때도 조금 더하는 것이 욕심이 되는가 하면 진실일 경우도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욕심이냐 진실이냐하는 평가는 그 누구도 섣불리 내릴 수는 없지만 표면에 드러난 사실이나 현상보다는 각자가 지닌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마음의 상태는 결국 자기 몸이나 주위에 나타나는 수호의 모습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가령 몸살이 났다고 칩시다. 이것은 욕심내서 한 일이 누적된 결과로써 나타나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몸살이란 몸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정직합니다, 마음은 속일 수 있지만 몸은 속일 수 없습니다. 몸이 살려달라고 할 정도로 뭔가 욕심내는 일이 있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만성이 되고, 큰 병으로 나타나 삶을 괴롭게 합니다.

한쪽의 욕심은 다른 쪽의 길을 막아버립니다. 서로돕기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서로 돕는다는 것은 한쪽을 내려놓아야 다른 쪽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길에서는 삼가를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남을 도우는 것은 진실로써 하는 일입니다.

욕심을 삼가서 서로돕기에 나서게 하는 것, 이것이 진실이고, 진실은 즐거운 삶으로 이르게 합니다. 진실로써 하는 일은 조금 더, 조금 더해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바람처럼 태양처럼 지치는 법이 없고,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합니다.

 

좀 더 해서 뭔가 모르게 지치고, 마음에 걸리고, 즐겁지 않아진다면 욕심이 지나치지 않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반대로 좀 덜 해서 마음에 걸리고 편치 않다면 좀 더 하는 진실을 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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