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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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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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218(음력 정월 26) 오후

188719(음력 1216)부터 교조님께서는 몸이 조금 불편하여 쉬고 계셨다. 118(음력 1225) 밤부터 신악근행과 12장을 시작하여, 217(음력 정월 25) 밤까지 밤마다 근행을 올렸고, 218(음력 정월 26) 12시부터 교조님의 신상이 위독하시므로, 그때부터 감로대에서 신악근행에 이어 12장의 손춤을 올렸다. 그때 신노스케는 모여 있는 사람들과 여러 가지로 의논한 다음, “근행을 올릴 때 설사 경찰에서 어떠한 간섭이 있더라도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근행에 나오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모두들 마음을 단단히 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근행에 참여한 사람은, 창인에 이즈미타 도키치(泉田藤吉), 히라노 나라조(平野楢蔵), 신악에 신노스케, 마에가와 기쿠타로, 이부리 마사진(飯降政甚), 야마모토 리사부로(山本利三郎), 다카이 나오키치, 마스이 이사부로, 쓰지 주사쿠, 고다 주자부로, 우에다(上田) 이소, 오카다 요노스케[岡田与之助미야모리 요사부로(宮森与三郎)], 손춤에 시미즈 요노스케, 야마모토 리사부로, 다카이 나오키치, 마스이 이사부로, 쓰지 주사쿠, 오카다 요노스케. 악기에 나카야마(中山) 다마에(가야금), 이부리 요시에[飯降나가오(永尾)](월금), 하시모토 기요시(橋本清)(장구) , 여러 사람들이고, 집안 단속을 맡은 사람은 우메타니 시로베, 마스노 쇼베, 가지모토 마쓰지로 등으로 모두 19명이었다. 근행은 오후 1시에 시작하여 2시에 마쳤다. 이 근행이 끝남과 동시에 교조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그리하여 곳간 위층에서 이부리 이조를 통해 여쭈어 보았다.

자아 자아, 평탄한 땅으로 한다. 모두들 모였는가 모였는가. 잘 분간해 들어라. 이제까지 말해 둔 것, ()의 상자에 넣어 두었지만 신이 문을 열고 나갔으니, 자녀가 귀엽기 때문에 어버이의 수명을 25년 앞당겨 줄여서 지금부터 구제하는 거야. 단단히 두고 보라. 지금까지와 이제부터 앞날을 단단히 두고 보라. 문을 열고 평탄한 땅으로 할까, 문을 닫고 평탄한 땅으로. 문을 열고 평탄한 땅으로 해 달라 하지 않았는가. 소원대로 해 주었다. 자아, 이제까지 자녀에게 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미처 주지 못했다. 또 또, 지금부터 앞으로는 차츰차츰 리를 내려 주마. 잘 들어 두라.

 

이러한 말씀이 있고 나서, 이윽고 장례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223(음력 21) 장례식에는 제주에 모리야 히데오, 부제주에 가사마쓰 고키(笠松古輝)였다. 제관은 미와(三輪)에 있는 오미와교회(大神教会)의 교직자 및 천리교의 교도직(教導職). 참배자는 1만 명 이상. 묘지는 마가타(勾田)마을의 즈코지(頭光寺) .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행렬은 묘지까지 이어졌다. 시호(諡号)는 모리야 히데오와 의논한 다음, 마미치이야히로코토시리메노미코토(真道弥広言知女命)라 칭하기로 했다. 교조님의 춘추 9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