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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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년08월]두통과 전도-정귀남

2012.06.12 22:12

편집실 조회 수:2843

참여마당

두통과 전도

정귀남(남일교회, 현대포교소)

 

며칠 째 불면에 두통까지 이어졌습니다.

두통이 너무 심해져서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와 뇌파검사까지 해 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이 없었습니다. 어지러움까지 겹치어 출근도 하지 못한 채 집에 누워 있는 날, 큰언니인 본성교회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음을 염려하시길래 사실은 두통과 어지러움 때문에 출근도 못하고 집에 누워 있노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언니는,

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전도를 해라. 두 시간만 낯선 사람들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전도지를 건네라. 머리가 아픈 데는 그만한 치료가 없다. 고성초대교회장님 살아생전에 두통을 호소하는 신도들에게 이르신 가르침이다. 전도지를 건네자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을 낮추지 않을 수 없으니 고개를 숙이며 마음을 낮추다 보면 두통은 훨훨 날아가 버린다. 잠도 절로 온다. 네가 은 하고 있지만 명색이 포교소장의 아내가 아니냐.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 전도지 들고 나가라.” ‘, 맞는 말씀이다.’ 싶었습니다.

항상 전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서 하루에 한 시간 만이라도 전도를 하자고 몇 번의 다짐을 했었으나 이리저리 생각만으로 그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 ‘뭐 전도가 되겠어? 물어오면 뭐라고 답해? 막상 신앙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인도하지?’ 하는 온갖 앞선 생각들. ‘아니야. 우선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고 전도지를 건네는 것이 어버이신님께서 내게 주신 숙제이다. 어버이신님께서 내려주시는 과분한 수호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높아져 버렸나보다. 전도지를 건네다 보면 신님께서 일러주시리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을 정갈하게 씻고 잘 안 입던 단정한 흰 블라우스를 꺼내어 입었습니다. 어버이 신님께 엎드려 마음을 고한 다음 전도지 한 웅큼 불끈 쥐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 너무도 오랜만의 전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선뜻 전도지가 건네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막상 차가운 표정의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고 다정하게 인사하며 천리교 신앙하세요.”하며 전도지를 건네려니 나도 모르게 부르르 볼 살이 떨렸습니다.

그런 내 모습에 깜짝 놀랬습니다.

, 그렇구나. 이렇게 높아져 있었구나.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높아져 아무에게나 고개 숙일 수 없을 만치 교만해 졌구나.’ 하는 생각에 깊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부터는 높아진 내 마음에 반항이라도 하듯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더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전도지를 건네었습니다. 손에 짐을 들고 있어서 전도지를 받을 수 없는 분들에게는 큰 목소리로 천리교 신앙하세요.” 하며 인사만 건네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전도지를 잘 받아주었습니다. 거절하는 분도 있었지만 고개 숙이고 인사드리니, 고개 숙여 인사하며 전도지를 받는 분이 더 많았습니다. 저 사람은 차갑게 거절하겠구나 싶은 사람에게도 미소 지으며 전도지를 건네었습니다. 그런데 거절하지 않고 선뜻 받아서 읽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전도지를 건네며 다니자니 지금은 고인이 되신 본성초대교회장님이신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 엄마를 생각하면 언제나 용기 있게 전도하시던 모습!

엄마의 가방 속에는 언제나 전도지가 가득했습니다. 엄마는 어디를 가든 잠시의 틈만 있어도 전도를 하셨습니다. 대문 앞만 나서면 엄마의 손에는 반드시 전도지가 들려지셨고, 바로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사람을 기다리면서도 언제나 전도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엄마를 모시고 공원을 놀러갔는데 다니다 잠시 풍경을 찍고 돌아보니 엄마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찾아보니 어머니께서는 공원에 앉아 사주팔자를 봐주고 계신 아저씨를 붙들고 전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만물을 살려주시는 으뜸의 신 천리왕님을 믿으시면 아저씨의 운명과 팔자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천리교를 신앙하셔서 당신의 운명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옆에서 엄마의 전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나는 엄마의 전도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다정하고 온화하시기만 하시던 엄마는 전도 하실 땐 다른 모습이었지요. 눈은 반짝이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치셨습니다. 그러면 듣고 있는 사람들은 넋이 나간 듯 엄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것저것 묻고는 했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데려가지 않으려 해도, 나는 기를 쓰고 엄마의 전도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곤 했습니다. 엄마가 전도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으니까요. 엄마는 항상 그렇게 전도를 하셨습니다.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진료를 가셔서도 병원 대기실에서 전도를 하셨지요.

 

돌아가신 그 날도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 신자의 자녀가 아프다고, 자녀가 아픈데 신자인 그 엄마가 식당일을 하느라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고 먼 길을 나서서 부산까지 오셨습니다. 아이에게 수훈을 전하고 곁을 지키시다가 신자의 집에 주무시면서 어버이신님의 품속에 안겼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가 엄마의 출직 앞에 황망하기만 한데, 함께 달려간 시어머님께서 엄마의 가방을 열어보시곤 눈물짓고 계셨습니다. 엄마의 가방 속엔 별다른 소지품 없이 엄마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전도지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엄마의 손자국 가득한 전도지를 손에 쥐고 원남성 전도사시절부터 다정한 벗이셨던 시어머님께서 하염없이 울고 계셨습니다.

 

엄마는 심장이 좋지 않으셨고 또 한쪽 다리가 불편하셨습니다.

어릴 때 주마담을 앓은 터이라 한쪽 다리의 무릎이 굽혀지지가 않았고 걸음을 걸으실 땐 균형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편하신 다리로 하루에도 몇 시간씩 전도를 다니셨습니다. 더 젊으신 시절엔 며칠씩 걸으며 전도를 다니셨지요.

어느 날 전도를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엄마가 옷을 너무 소홀이 입고 나갔더니 거지인 줄 알았나보다. 밥을 얻어 먹으로 온 줄 알고 미처 전도지도 건네 보지 못한 채 내쳐졌구나.”

꾸미지 않은 모습에 다리를 절며 전도를 하러 가정방문을 하니, 그런 일을 당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한 두 번도 아니었을 테고 더한 일들도 많았겠지만 어머니는 그 다음부터는 전도를 나서실 때 로션이라도 하나 챙겨 바르고, 거울을 한번 들여 보고는 전도에 나섰습니다. 나에게도 이르시길, 이 다음에 전도를 할 땐 평소보다 더 이쁘게 해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버이 신님의 용재임을 항상 자랑스러워 하셨던 엄마!

감화를 하실 때면 진실한 신님에는 틀림이 없다!”고 항상 힘차게 들려주시던 엄마! 따로 꾸미시지 않아도 어버이 신님의 가르침을 전하시던 그 당당함과 용기 앞에서 나는 엄마가 항상 눈부셨습니다.

엄마가 장애자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이 나를 놀린다고 귀남이 엄마는 절름발이다. 절름발이다.”하며 노래를 부르며 놀려도 나는 오히려 왜 우리엄마를 절름발이라고 하지? 참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 스스로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놀려도 놀림이 되지 않자 친구들도 더 이상 그렇게 놀리지 못하였습니다.

내 생각 속에는 항상 우리 엄마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 우리 엄마는 남을 도우는 사람이다. 우리 엄마는 선생님이고,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보다 더 건강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부자인 사람들도 엄마를 찾아와 신님의 말씀을 듣고는 용기를 갖고 마음을 살리고 실천하여 건강도 찾고, 가정의 행복도 찾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으니까요. 다 죽어가던 환자가 교회에 와서 얼마간 머무르며 신님의 말씀을 듣고 수훈을 받고는 거짓말처럼 나아서 회복하는 것을 정말 수도 없이 보았으니까요.

 

그러한 가운데 나도 엄마처럼 용재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도 엄마처럼 전도지 들고 아프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 어버이 신님의 가르침 속으로 인도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용재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 한 때 거제로 단독포교를 나가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결혼을 하고, 엄마가 쌓아주신 덕으로 나날이 어버이 신님의 넘치는 수호 속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는 가운데, 자꾸만 용재로서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마음 가득 교만까지 차오르고 있었나 봅니다.

전도지를 건네는 한 걸음 한걸음 반성을 하며, 마음을 다져 먹고 있자니 정말 어느새 두통은 말끔히 가시고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 어버이 신님! 감사합니다. 바르게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흐트러지면 또 이끌어주십시오.’

집으로 돌아와 어버이신님께 감사 참배를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가방 속에서 전도지를 빠트리지 않고 하루하루 전도하는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며 즐겁게 생활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져 봅니다. 어버이신님의 나날의 감사한 수호에 은혜보답을 하며 엄마의 부끄럽지 않은 딸로서 생활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