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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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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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 173년 후반기 용재연성회 강의

 

내가 꿈꾸는 고성교회 미래모습

이 상 봉 (고성교회장)

 

* 이 내용은 지난 97일에 있었던 후반기 용재연성회 강의를 녹취하여 풀었습니다. 많은 참고와 도움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반갑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저번 822일 상급 원남성교회에 전()진주님께서 순교 오신 것에 대해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날 순교오시는 준비를 위해 여러 가지로 정성을 모아주시고 근행을 올리기 위해서 4차례나 사전 연습도 했습니다. 그래서 순조롭게 잘 끝났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 날 전진주님께서는 원남성교회 배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크게 신악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었고, 근행도 악기도 모든 것이 외국에서 이런 정도까지 근행을 올리는 것에 대해 감탄을 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진주님 코앞에서 신전강화를 들었습니다. 말씀하실 때는 전부 다 일본어로 말씀하시고 첫 서두에 한국말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행히 일본어를 들을 줄 알았기에 잘 들었습니다만 말씀이 스며들 듯이 와 닿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이야기를 하다가 전달이 잘 안 될 때는 큰 소리로 말하거나 고함치고, 윽박지르게도 됩니다. 그런데 진주님 말씀은 스며들 듯이 파고드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날 사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욕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시면서 나도, 여러분도 욕심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주 강렬하게 와 닿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다 욕심이 있는데 용재는 그 욕심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습니다. 나 혼자라면 욕심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가족, 사회, 우리나라, 지구 전체로 범위로 넓혀 가다 보면 우리가 가진 욕심도 알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우리들이 지구의 자원을 너무 많이 써서 1900년대부터 지구가 제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자원이 다 바닥이 나서 곤란한 생활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자원이 없으면 가장 먼저 곤란을 느끼는 사람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인데 물, , 바람의 혜택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을 바꿔 생각하면 우리 신앙하는 사람도 그런 비교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얼마 전 집사람이 어떤 포교소장과 이야기를 했답니다. 자기 포교소에 신앙하는 분 이야기를 하면서 한마디로 골치가 아프다. 신앙을 오랫동안 하며 따라 다녔는데, 항상 요구사항도 많고 불만도 많아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따라오니 골치 아프다. 이건 잘못되었고, 이건 불만이다 하며 따라오니 참 머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스갯소리지만 생각나는 말이 있었습니다. 천리교는 똑똑한 사람은 아예 못 따라 갈 것 같아서 옛날에 다 떠났고, 바보같은 사람은 남아서 잘 따라오고 있고, 반 똑똑이들은 떠나지도 않고 열심히도 하지 않으면서 어중간하게 남아 곤란하게 한다고요. 제대로 하려면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시골에 사는 사람보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똑똑하겠죠. 현대사회에서 똑똑하다는 것은 자신을 더 잘 보살피고 자신을 위한 성취를 더 잘 이루어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일반사회에서는 차라리 사욕이나 탐욕을 가지고 있어야 뭐든지 성공한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조님은 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고적대활동을 하면서 올해로 3년째 어린이 터전귀참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다른 교회의 어린이 터전귀참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 볼 때 외국인 한국에서 많은 인원을 데려오고, 성적도 좋고,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쭐해 진 적이 있습니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그 결과에 도취해 있었는지 모르지만 3년째 가다보니 다른 교회 사람들이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10명 정도 데리고 경연대회에 참가한 곳도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인원이 아무리 적더라고 40년째 참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 회장님은 8대이신데 자기 교회가 사정교회지만 아이들 모아서 40년 째 안 끊고 이어오고 있다 했습니다. 심지어, 한 두 명 자기 아이들만이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참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환경이라면 사명감 없이 도저히 못해 낼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이 분들은 욕심을 떨어내는 기초적 품성을 많이 갖추고 있구나싶었습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신자도 떨어지고, 포교도 안 되고, 사정이 생기면 이제 이것도 그만 둬 볼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한다는 것은 사욕을 저버린 기본 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몇 십 명이 가서 좋은 결과를 얻고 하는 우리들 보다는 어려워도 40년이나 욕심없이 그저 이어간다는 마음으로 계속 해 온 그 마음이 너무나 대단하고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신악가에 신님의 앞에서는 사욕이 없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극한 상황, 위기상황을 만나면 자기 본성이 나옵니다. 전쟁 같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6.25전쟁 같은 극한상황에 마주치면 같은 동네 사람일지라도 이념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고, 전쟁 때 부역했다고 죽이고 합니다. 일제시대에 친일했다고 처단을 했습니다. 육이오전쟁 난리통에 부역을 해서 협조를 했던,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던,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려 자기 생명을 위협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은 두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많이 학살했지 않습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나쁜 일을 많이 한 악한 사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본성이 우리들 마음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본성 자체를 사욕이 없는 마음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항상 그것을 되 집어 봐야 합니다.

 

이길에서 극한 상황이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신상, 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어려운 신상이나 사정이 왔을 때 극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도 가난에 떨어지지 않으면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원어에는 맛을 모른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정을 모른다가 아닙니다. 옆에서 수박을 먹는 사람이 아무리 달다 해도, 정말로 먹어보지 않으면 맛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도 불치병에 걸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을, 그런 중한 신상자의 마음을 모릅니다. 정말 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본성, 심성들이 신상, 사정을 만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드러나고 나 자신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인연에 대한 자각이나 이해도 생길 수 있고, 어쩌면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상 사정을 흔히 마디라고 합니다. 마디가 없으면 정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의 맛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어려운 일을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모릅니다.

요즘 매스컴에서 한참 논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자녀의 출세를 위해 부모들이 자녀의 회사, 직장에 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녀가 다 큰 어른이 되었는데도 헬리콥터를 타고 자녀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듯이 자녀를 간섭하고 보살피는 걸 헬리콥터 부모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물족이라고 있는데 괴물이 아니고, 과물입니다. 뭐든지 전화가 오면 과장님한테 물어보고요.’ 하고 무조건 대답을 미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화를 바꿔 줘버리고, 어려운 일을 자기가 전혀 처리하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고 맛을 보지 못하면 결코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조님이 모본 가운데 맨 처음 하신 것이 가난에 빠지신 것이었습니다. 물질을 없애는 것이 사욕을 털어버리는 첫 번째 방법임을 시사합니다. 생활자체를 아주 검소하고 검약하게 하지 않으면 맛을 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성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중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에 고성지역에 아는 사람, 친구들이 많습니다. 가끔 친구들이 어이, 천리교 교주, 어찌 지내노?” 말끝마다 그렇게 천리교 교주! 교주!” 합니다. “난 교주 아니다. 교주는 사이비 종교나 그런데서 쓰는 말이고 교회의 주인을 말하는 거지, 내가 우찌 주인이고?”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교당도 대단히 크고 하니까 대단한 재산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2002년도에 교회장 되고 나서 9년째인데 마이너스 통장입니다. 재산 증식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부자라고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절대로 재산 증식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재산을 굴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사욕을 없앤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포기한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일선포교를 하시는 분들에게도 재산증식이나 물질에 대한 세상의 이야기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욕을 버린다는 것은 일단 물질적 출세나 기득권을 바라지 않는 것, 거기서 시작합니다. 또 거기서 더 나아가면 듣는 것도 인연, 보는 것도 인연이라고 되어지는 대로 받는 것이 신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 내 앞일을 생각해보면 어찌 사욕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특히 요즘은 자녀 교육시키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벌이가 100만원이라면 반 이상을 쏟아 부어서라도 서슴지 않고 자녀교육에 투자를 합니다. 정말 일선포교하시는 분들은 자녀교육에서 세상을 따라가려고 하면 앞이 캄캄합니다. 저도 아이들 학원을 보는 걸 절대 반대하거든요. 만약에 그런 식으로 보내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예전에 자산관리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버는 게 얼마고, 나이가 얼마고, 돈은 앞으로 얼마씩 벌 것이고, 자녀가 몇이라는 내용을 넣으면 자산을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거기 넣으니 둘째가 대학 2년이면 파산이더라구요. 그러니 세상 방식으로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의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한다면 정말 부질없는 짓입니다. 돈이 없어도 성공할 아이는 성공합니다. 안 되는 아이는 안 되고요. 안 되는 아이들한테 돈을 쏟아 부으면 얼마간은 억지로 뭔가 될지 모르지만 다 부질없는 짓 아닐까요.

 

이런 경쟁사회 학력사회에서 아이들을 고적대로 해서 어린이 터전귀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기 전에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토 일요일을 이용해서 연습해야 하는데, 시험 친다고 말도 많고, 오지도 못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굉장히 많은 시간을 빼내서 연습해야 합니다. 고적대 하는 아이들은 학원 안 가지, 토 일 시간 빼내서 시간투자하지, 터전귀참해야 되니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죠. 그래도 학교에서 일등 했다는 아이가 나옵니다. 학원 안 다녀도 어차피 되는 아이는 됩니다. 성적이 올라갑니다.

세태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수입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면서 자녀들에게 이기심을 키우고 경쟁하도록 몰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요. 자녀들에게 과연 사욕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욕심대로 할 것 같으면 자녀들이 공부도 잘해야 하고, 좋은 대학도 가야하고, 좋은 직장에 수입도 많아야하고, 결혼도 잘하고, 건강하기를 바라겠죠? 하지만 그런 건 용재의 입장에서 보면 세속적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것 잘 못해도 욕심없고 맑은 사람으로 자라나면 나중에 더 크게 쓰일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 TV 뉴스에도 나옵니다. 유명한 해외 스포츠 스타가 외도를 해서 부인에게 이혼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위자료로 1,800억원 물어줘야 한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상상이 안 되는 액수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개념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 같으면, 물론 그리될 리도 없겠지만(웃음), 똑똑한 부인을 둬서 위자료 천팔백억 안 물어주고 싶은데. 예쁜 마누라도 필요없고, 할머니랑 살아도 되는데. 뭐 그리 하고 싶을까? 그런데 세상에는 이혼하면서 그런 돈을 물어주고 하는 게 부지기수 아닙니까? 결국 그런 게 가진 사람의 탐욕스런 모습이 드러난 양상입니다.

 

끊임없는 욕심의 경쟁대열에 뛰어들어서 우리가 경쟁하겠다는 것 자체가 무립니다. 물론 재능있는 아이들은 키워내야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기만 아는 사람으로 키우면 무슨 소용입니까?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어 부모 버리는 사람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맑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바꾸고, 자녀도 그렇게 키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스카이(서울대, 연대, 고대)에 들어갔다면 축하할 일이지만, 저는 지방대학을 가도 되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스스로 제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것이 교조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내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 주변사람까지도 욕심이나 사욕이 없는 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욕이 한이 없는 진흙물이야 마음이 맑아지면 극락이로다 하지 않습니까. 극락의 반대는 지옥입니다. 지옥은 불편하고 괴로운 것, 그만큼 내가 마음이 맑지 못하다, 욕심이 많다는 것으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조님 말씀에 [이길 속에 세계가 있고, 세계 안에 이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길 안에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이길을 신앙 해 가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신앙 안 하는 세상 사람 가운데도 이길의 가르침과 맞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길을 추구하는 용재들이 세속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부분이 제대로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고, 다리에 걸리는 부분입니다.

 

앞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지구상의 자원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데 그것이 총 인구 64억이 나눠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나라가 물 부족국가라는 말을 들어보았어요? 어떤 교수는 아니래요. 옛날에 통계라서 잘못되었답니다. 우리나라는 물이 넘쳐난대요. 다른 나라는 물이 없어서 8초마다 한명씩 죽는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물이 없어 난리인거죠. 우리는 물이 풍부해서 함부로, 마음대로 쓴다고 한다면 그건 욕심이죠. 우린 아무런 생각없이, 죄책감없이 쓰지만 전체를 생각하면 그건 욕심인 것입니다. 이걸 만약에 생활면에서 욕심을 버리고 남을 돕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겠죠.

여름이 되면 교회의 골칫거리가 있습니다. 전기세입니다. 학생, 어린이 수련회 같은 행사가 많으니까 전기세가 많이 듭니다. 여름에 덥다고 에어컨을 많이 틉니다. 요즘 학생들이 절약하는 습관이 안 되서 왔다 간 뒤 안 챙기면 밤새 에어컨이 돌아갑니다. 그러면 전기세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그런데 아이들한테 아무리 이야기를 많이 해도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지나면 전기세, 수도세 같은 것이 걱정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걱정을 했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살아야겠다. 우리는 앞으로 살림살이를 줄여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신자들이 늘고, 정성금이 늘어서 교회가 더 크고 원활하게 잘 돌아가면 더 좋겠지만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맞춰 살아야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의 생활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있는 에어컨도 못 돌리고 떼어내고 창문을 열어 자연바람으로 살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사회의 관점을 이야기 하면 자꾸 더 돌려서 소비를 진작시키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줄이고 포기하는 것도 욕심을 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해서 성공하고 잘되는 길만 있는 게 아니고, 어려울 때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조님 모본의 길은 사회적, 세속적으로 성공이라는 잣대로 본다면 실패작입니다.

강의 제목이 고성교회 미래모습이라고 했는데 미래모습 가운데 가장 걱정되는 것 중에 하나가 고성에 이어지는 모든 교회, 포교소가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은 모르지만 10, 20년 지나고 나면 걱정되는 것이 후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걱정되지만 교조님 모본을 생각해 봅시다. 교조님 후계자문제, 잘 해결되었습니까? 해결 안 되었습니다! 자녀분들 아무도 못 받았잖아요? 우리로 말하자면 후계자를 다른 데서 데리고 온 것이죠. 세속적 성공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관점으로 봐서도 관점이 전혀 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을 시작할 때 내 신상과 사정을 도움받고 싶다, 집안도 다 편안하고 싶다, 그것도 가능하면 오랜 시간동안 가족도 다 건강하고 화목하도록 수호받고 싶다고 바라면서 입신합니다. 그런 것이 수호라고 생각합니다만 교조님의 모본은 정반대의 길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우리와 다른 결정적인 점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교조님은 어려운 데를 즐겁게 지나셨다는 것입니다. 못 살겠다, 우찌 해야 하노?’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다 토로하며 지나는 것과 즐겁게 지나는 것은 다릅니다. 교조님께서는 어쨌든 욕심이 없어야 즐거워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꼭대기에 살든, 골짜기에 살든 욕심이 있으면 즐거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보통사람인 우리들에게는 힘든 상황에서 즐겁게 걷기 힘듭니다. 왜 즐겁게 걷기 힘드냐? 욕심 때문이지 않습니까. 만약 모든 현실이나 환경이 바뀌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내일부터 밑바닥에 떨어져서 산다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포기가 가능하겠는가? 욕심이 있는 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적게 가질수록 편하고, 딸린 식구가 적을수록 편합니다. 그러나 딸린 가족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정말 힘들 때가 많습니다.

교조님은 세상 눈으로 보면 참으로 어려운 길을 즐겁게 걸어주셨습니다. 그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교조님을 따라서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이 나온 것 아닙니까? 자기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어렵고 힘든 마디 속에서 잘 견디어 온 사람들이 끝까지 남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호 받아서 좋다고 했던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든 마디 속에서 단련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들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씁니다. 그때 어떤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까.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하는 데 나이 드신 분을 배려하는 것, 우선하고 예우하는 것이 도리라고 합니다. 그것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연장자부터 교회장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한참 아래인데도 교회장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한 리라는 것은 그 도리하고는 틀리지 않습니까?

보통 도리라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사정에 맞춰 가장 좋은 방법이 도리입니다. 그런데 용재들은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보아야 하고, 부딪쳐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야말로 리를 세우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도리에 안 맞는 일을 보고 당해야 할 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못 받아들이고, 못 지나가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 리라는 것이 인간 사정에 비춰보았을 때는 합당하지 못하지만 신님의 리로 보자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다 인연이기 때문에 모두 감수하며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인간 사정에 비춰봤을 때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단노하고 만족스럽게 지나가면 어버이신님의 리를 세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당한 일을 만났을 때는 이것은 신님의 리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요즘 사회의 세태라든지, 세상의 풍조는 자기를 세우고 권리를 이야기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을 당연시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교회 안에서도 자기 권리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 데 왜 안 해주느냐? 다른 종교에는 이런 복지 혜택을 주는 데, 여기는 왜 그런 대우를 안 해 주느냐? 하면서 자기 리를 세우는 것이 세태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따라가면 신님의 리는 세울 수 없습니다.

초대선생님들이 도리에 맞지 않은 가운데, 어려운 가운데를 힘들게 걸어왔기 때문에 진기한 수호가 났던 것입니다. 자기 편할 도리에 맞췄다면 이길이 생기도 않았을 것입니다.

올해는 우리 고성 초대회장님이 포교하신지 58년째입니다. 초대회장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 좋은 환경이지만 오히려 이것이 이길을 가는 우리들한테는 리를 세우고, 사욕을 버리고, 남을 돕고, 히노끼싱하는 환경에서는 자꾸 멀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지도말씀에 고생을 하려고 해도 고생을 하지 않는 날이 온다고 하셨지만 그런 시절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고생을 해야 하는 시절도 있는 법입니다. 지금은 환경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욕을 버리고 성인하는 데는 불리한 환경 속에 놓여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맑혀서 성인해 나가는 데서 이길의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출세를 목표로 해서는 절대로 이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전진주님께서는 교회의 사명이 근행을 올리는 것, 포교를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통은 포교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날은 히노끼싱이라고 말을 바꿔서 해 주셨습니다. 히노끼싱이라 하는 것도 사욕이란 말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욕이 있으면 히노끼싱이 안 됩니다. 대가없이 하는 히노끼싱이 이길 신앙의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고적대 주제곡은 즐거움을 전해가자는 것이었고, 작년에는 마음의 꽃을 피우자는 제목이었습니다. 이 곡은 3대 진주님이 취임하실 때 만들어진 곡입니다. 내용은 시순이 싹트는 상쾌한 이 시순에 진실한 마음의 꽃을 피우자, 세상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성진실한 마음의 꽃을 피우자는 내용입니다. 상쾌한 시순은 진주님이 취임하는 시순이라는 것입니다. 이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결실이나 메리트는 마음에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진실되고, 용솟음치고, 즐겁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해가는 것이 마음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 사회 사람들에게 천리교하면 히노끼싱이라고 인식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가면 갈수록 히노끼싱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점점 히노끼싱할 사람이 없어지고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어린이 터전귀참 가보면 그 많은 행사가 히노끼싱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기 사람들은 아무도 돈받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직장 다니다가 휴가를 받아서 히노끼싱을 하고 있습니다. 세대가 바뀌어도 그렇게 히노끼싱으로 이어져 가는 것이 대단합니다. 몇 십만 명이나 모이는 행사가 그렇게 히노끼싱으로 유지되고 60년이나 계속 이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출세나 성공을 바라는 세속적 마음으로는 결코 히노끼싱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올 수가 없습니다.

신상 사정은 이길의 꽃이라고 전에 많이 들었죠? 그런데 이 말이 요즘은 죽은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신상 사정을 만나면 이길은 아닌가? 안 되는 가싶고, 기가 죽습니다. 오로지 오래 살고 건강하고 내 잘 되어지는 것만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조님 은신 시절로 되돌아보면 선인들은 목숨을 바쳐 근행을 봤는데 요즘은 뭔가 좀 안 풀리면 근행도 못 보겠다고 하는 세태로 자꾸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가 기본적인 본성, 품성을 바꾸려는 노력을 게을리 탓이라 생각 합니다.

앞으로 우리 용재들이 교조님 모본을 따라가면서 맛을 보고 체득을 할 때야말로 우리 고성교회나 산하교회의 미래가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초대회장님이 걸었던 그런 것을 체감하고 맛을 봄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이나 후대에게 전해가는 데서 성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시스템이나 제도가 개선되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길이라고 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마음에 비추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가 들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세상의 마음에 따라,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산다면 이길을 날 수가 없다.’ (1900. 11.16)

어떤 분들은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젊은 사람이 교회 와서 이렇게 신앙에 매달려 있나? 젊을 때는 사회 나가서 돈도 벌고 나중에 할 때 되면 들어와서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에 비추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는 절대로 못합니다. 이미 세상의 법도, 도리에 젖어 들어서 생각의 기반이 틀리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본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래서 이길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비춰주기 위해 소년회, 어린이학교, 수련회를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런 마음을 길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세상의 법도에 따라가면 우리 애는 학원에 보내야 되는 데 방학때 교회 수련회 못 보내겠다. 입시가 있고, 시험봐야 되는 데 못 보내겠다고 하면 앞으로 점점 이길이 더 좁아지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탐욕에 마음이 물들지 않게 하고, 하나라도 남을 돕고 히노끼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극한 상황을 만나면 자기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두 종류의 사람, 즉 선하고 악한 사람밖에 안 남게 됩니다. 그때야말로 용재로서 평소에 갈고 닦은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을 구제하고, 자신도 구제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성교회에 이어지는 교회, 포교소의 미래도 열려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