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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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32

여덟가지 티끌과 마음청소 19

 

이 시 중

. 여덟가지 티끌의 내용

 

3. 미움

3) 남을 험담하고 비방하다

미워하게 되면 좋은 태도가 나오지 않고 따뜻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례한 행동, 막말 끊는 말을 쏟아내게 됩니다. 미운 사람이 잘되는 꼬라지도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하고, 험담하고 비방을 합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참 쉬운 일입니다. 돈도 안 들죠, 재미도 있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디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흉볼 사람은 없겠지요. 흉본다는 것 자체가 싫어한다는 증거고, 미워한다는 표현입니다. 아니면 교만해서 그렇겠지요.

비난이 돈 안 들고,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디서나 가능하다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함정에 쉽게 빠지는지 모릅니다. 비록 그를 미워하지 않고 비난할 의사가 없다 해도 비난하는 자리에 쉽사리 끼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끼이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동조자가 되고 맙니다.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적든 많든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남을 비난하고 험담하는 일이지만 반대급부로 치루어야 할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남을 향한 비난이 알게 모르게 고스란히 내 잠재의식 속에 담깁니다. 원하고 바라지도 않지만 이미 자기 영혼을 더럽히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새 뜻하지도 않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위에 뿜어내며 남에게 옮기기도 하겠죠. 확대재생산하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남의 영혼까지 더럽히는 티끌을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도말씀에서는 남을 험담하는 것에 대해 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을 헐뜯음으로 티끌이 이는 거야. (······) 나날의 길을 지나려고 생각한다면, 남을 헐뜯는다든지 나쁘게 말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남을 헐뜯고서, 아무리 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도, 헐뜯기 때문에 길을 없애는 것과 같은 거야.

(1890. 2. 6)

없는 데서 험담하는 것은 10대의 죄라 한다. 없는 데서 험담하면 그 자에게 당장 말해 주어라. 그 자를 위해서야. 오는 자에게 가라고 하지 않고, 오지 않는 자에게 오라고 하지 않아. (1891.1.29.)

숨어서 하는 얘기는 옳은 것 없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그대로 당장 깨우쳐 주어라. 숨어서 하는 얘기는 티끌을 쌓는 토대라고 깨우쳐둔다. (1893.12.6)

 

남을 헐뜯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신의 일을 할지라도 허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리고 험담이라는 게 보통 몰래 숨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숨어서 하는 이야기 치고 좋은 이야기도 없습니다. 예사로 하기 쉬운 험담이지만 이것은 결국 대대로 내려가는 깊은 인연이 되고, ‘티끌을 쌓는 토대라고까지 하시니 예사롭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석 이후에 수훈의 리를 내려주신 우에다 나라이또님은 누군가 남을 비난하고 험담하면 아무 소리 안하고 그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남에 대한 험담을 자기 자신도 하지 않았지만 남이 하는 험담도 듣지 않았다는 거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험담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남을 비난하면 비난 받는 그 사람이 가치 없어 보일 것 같지만 오히려 가치가 더 없어지는 사람은 바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깎아내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믿게 하려고 남을 험담합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험담하면 할수록 험담하는 사람이 더 격이 낮아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흔히 우리들은 남이 이룬 성과나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하며 쉽게 평가를 내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를 어떤 마음으로 하는 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사심없이 하는 비평인지, 아니면 남의 노력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하는 비판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운 마음으로 무턱대고 해대는 비난인지 말입니다.

남이 이룬 일이나 성과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리 저리 말을 하지만 어쩌면 그 일을 내가 직접 한다면 그 만큼이라도 해 낼 수 있었을까요. 평생을 해도 안 될 수 있고, 어쩌면 몇 생을 거듭해야 할 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도 손쉽다고 남을 비난하고, 혹은 맞장구를 치며 같이 동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티끌을 쌓는 일일까요.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정하고, 덧칠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좋은 것은 가까이 하고, 싫은 것은 밀쳐냅니다. 좋은 것이 가까이 있으면 좋고, 싫은 것은 멀어질수록 좋아합니다. 좋은 사람은 가까이 두고 편애하며, 싫은 사람은 벽을 쌓고 미워합니다. 편애해서 좋을 것 같지만 편애하는 그것이 사라질까 두렵고,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어도 미워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아 괴롭습니다. 편애해서 두렵고, 미워해서 힘듭니다. 이래저래 두렵고 괴롭습니다. 이렇게 되면 삶이 불안정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좋은 것이 사라지고, 나쁜 것이 가까이 오면 이내 무너져버리고 마는 불완전한 행복, 반쪽짜리 행복에 목매달아 놓고 사는 꼴입니다.

마치 내 행복과 불행을 미운 사람에게 맡겨 놓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미운 그 사람이 주인이고, 마치 자기는 하인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주인 자리 넘겨주고, 하인을 자처하고 싶으면 잔뜩 미워하면 됩니다. 미워하는데 돈도 들지 않고 방해물도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미워해서 내 처지가 좋아지고, 미운 사람이 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나 자신만 더 못난이가 됩니다. 못난 짓인 줄 알면서도 그치지 못하니 이중삼중으로 괴롭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건만 이게 뭡니까. 미운 그 한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누구 잘못입니까? 미운 그 사람입니까, 미워하는 나입니까?

인연이라는 색안경을 끼지 않고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단노로써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고 즐거움이고 평화이지 요. 우리에게 몹쓸 병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감정을 개입시켜서 비비꼬아 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남에 대해서 말하고 옮기고 재미있어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미운 사람, 미운 짓거리가 아닙니다. 인연이라는 색안경에 가려 신님이 주시는 선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나입니다. 남에게 걸리지 않는 말, 행동이 나한테 걸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똑같은 말을 듣고, 똑같은 행동을 보는 데 왜 나만 신경 쓰느냐 하는 것이죠. 남들은 아무렇지 않는데 말입니다. ‘빨갛다, 파랗다하지만 내 마음에 끼인 색안경 탓이지 상대 탓이 아닙니다. ‘빨갛다, 파랗다하면 괴롭습니다. ‘극락이다 지옥이다하지만 결국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마음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떠나서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자각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런 자각이 없으면 늘 삶이 짜증스럽고, 부자유하고, 불행할 뿐입니다.

 

교조님을 보십시오. 남편 젬베에의 총애를 받던 하녀 가노가 주인마님 자리가 탐이 나서 교조님 드시는 식사에 독약을 탔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내 남편한테 꼬리치더니그것도 모자라 나한테 독약까지 먹여!”하며 거품 물고 악담을 퍼붓겠지요. 그런데 교조님 태도에서는 가노에 대한 비난이나 미움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불이 내 속을 씻어주셨구나하시며 스스로 자위하시고 가노에게도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안아 주셨지요.

이것은 미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보여주신 교조님의 모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조님 마음에는 미움 자체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같은 눈으로 볼 때 하녀 가노는 당연히 미워할 만한 사람이고 비난 받아 마땅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워하고 비난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쉬운 말은 아닙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조님의 일화를 되새기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마음을 다스려 가야할 목표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잘 새기다 보면 어느새 되는 날도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겪는 일은 교조님께서 당하신 그 일보다 훨씬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무턱대고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일을 당할 때마다 번번이 미움에 휘둘리고 비난에 휩싸인다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나날로 이어질까요. 이때 만약 교조님 모본을 떠 올리기만 해도 미움과 비난하는 마음이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일들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교조님이 당하신 일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을 테니까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받을 때도 있습니다. 미운 짓을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전혀 미운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비난받고 험담하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것 역시 교조님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조님께서 이길을 여신 이후 오랜 세월 극한의 가난을 지나 이길의 여명이 차츰 밝아오면서 교조님을 그리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 둘씩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교조님을 찾아 온 사람들은 고민이 해결되고 질병이 낫습니다. 이에 따라 교조님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도 귀찮아하고, 신직자 의사들이 시기 질투하고, 관헌의 탄압과 박해가 닥쳐옵니다.

그러나 교조님께서는 세상의 미움이나 비난, 박해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세계구제의 수단인 근행 올리는 것을 늦추는 법도 없었고, 물리적인 대응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급기야 감옥에 잡혀가도 저항하지 않고 의연하셨으며, ‘고산포교의 길이 열린다고 기뻐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교조님의 이런 태도에서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비난에 맞대응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교조님의 마음을 신악가 ‘3장 여섯에그리고 ‘4장 하나에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담아주셨습니다.

언제나 조롱받고 비방받아도 진기한 도움을 베풀것이니 (3장 여섯에)

남들이 무엇이라 말할지라도 신님이 살피시니 진정하여라 (4장 하나에)

우리들은 보통 남의 비난과 조롱에 민감합니다. 감내하지도 않고 참아내지도 못합니다. 단노는 더더구나 하기 어렵고, 세상 보통 사람들은 단노라는 게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신앙한다는 우리 역시 잔잔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나뭇잎같이 온갖 비난과 험담에 마음이 거침없이 흔들립니다.

소인은 남의 비난, 조롱에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말에 휘둘리고 맞대응을 합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대인은 남이 무어라 해도 쉬이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나무로 치면 소인배는 마치 잎이나 잔가지와 같고, 대인은 줄기나 밑둥치와 같습니다. 잔가지는 실바람에도 흔들리지만 밑둥치는 태풍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법이지요. 잔가지는 재목으로써 쓰일 수가 없고, 굵은 줄기라야 그릇이 되고 가구가 되고 집이 되고 배가 됩니다.

남의 비난이나 칭찬, 평가에 좌우되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용재로서 바르게 걸어갈 수도 없을 겁니다. 무엇이든 온화하게 받아주고, 단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교조님이 바라시는 참 용재가 되기 어렵겠지요.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지 마라, 험담하는 자리에 가지도 마라, 설사 남이 비방하고 조롱해도 진정하여라.’ 이것이 어버이신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