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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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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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34

 

옆에 있어만 줘도!

 

박지수

 

지난 11월 초에 아주버님께서 배에서 낙상사고를 당하셨다. 중상이라서 최소한 2-3개월 정도는 입원하셔야 한다고 했다. 움직일 수 없으니 대소변도 받아내야 한다고 걱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심한 중상이었지만 중요하고 심각한 부위는 괜찮았다는 것이다. 신경이라든가, 뇌라든가, 목뼈나 척추같은 곳, 내장기관같은 회복이 어려운 곳은 다치지 않아서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떨어졌으면 방치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단다. 그런데 마침 함께 있던 사람이 보고 있어서 바로 구조해낼 수가 있었다. 또 떨어진 곳이 중간에 가로지른 바닥이 있는 캄캄한 12미터나 되는 깊이였는데, 4미터쯤에서 가로지른 중간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만약 12미터로 떨어졌다면 정말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 또 조금만 옆으로 떨어졌어도 실명할 위기였는데 다행히도 왼쪽 눈 약간 위쪽으로 피해서 다쳤기에 그 부분의 타박상과 시력이 조금 감퇴된 정도로 머물렀다. 그리고 왼쪽 손목뼈가 접합수술을 할 수 없도록 부서졌는데도 신경은 전혀 다치지 않아서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왼쪽 장골(골반)도 수술이 안 될 정도로 부서졌는데 그 뼈들이 내장기관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었고, 뼈 외는 모두가 괜찮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들어보면 한 두가지가 아닌 엄청난 수호를 받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싶다. 이건 누가 돌봐도 돌 본 거라고, 평소에 뭔가 공덕을 많이 지었나 보다고 주변에서 모두 말한다고 했다.

형님은 마침 그 날이 아주버님 생신이라서 다니는 절에 생전 처음으로 떡 공양을 하겠다고 전화하셨단다. 그러고 한 시간 뒤에 일어난 사고여서 스님께서 떡 공양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으신 것이라고 했단다. 그것도 틀린 말을 아닐 것이다. 형님이 나름대로 열심히 절에 다니시면서 공덕을 쌓으시는 것도 사실이니까. 평소에 형님이나 아주버님이 주위에 베푼 덕을 생각해 보면 그런 수호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 때면 포교하는 우리가 친정갈 때 경비가 없을까 싶어 항상 봉투를 준비해서 뭐라도 사가라고 챙겨주셨다. 그리고 남편이나 내 생일에도 봉투를 챙겨주시며 둘이 맛있는 식사라도 한끼 하라고 하신다. 가끔 형님 댁에 들리면 이것 저것 항상 챙겨주셔서 양손 가득 뭔가를 얻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세월이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재작년 우리 포교소의 역사 때도 형님이 형제들이 곗돈 모은 것에서 얼마를 떼서 김치냉장고를 사줄까? 드럼세탁기를 사줄까?”하셔서 우린 그런 건 필요 없고, 신각이 필요한데요. 절에 불상을 모시듯, 그렇게 우리는 신각을 짜야 되는 데 3개 신각을 하거든요. 그 중에 한 곳(신님전) 신각만이라도 맡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되는 만큼이라도했다. 형님이 그게 얼마냐고 물었다. 얼마라고 하면서 그 보다 적더라도 돈을 주시면 보태서 하겠다고 했더니 아니다. 그렇게 하면 부처님을 모시는 데 팔 하나 없는 부처님을 모시는 셈이 아니겠나? 팔 하나 없는 부처님이라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의논해서 조금 더 모아 온전하게 하나를 할 테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한참 신각 비용 때문에 걱정하던 차라 너무나 고마워서 그날 밤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보통 큰 교회는 역사하면 수호를 많이 받는다고 신각을 서로 맡으려 한다는 데 우리에겐 서로 하려고 하는 신자가 없다. 그런 참에 형제들이 그렇게 해 준다니 우리도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특히 불교신앙에 빗대어 팔 없는 부처님을 모실 수는 없다고 하시고, 형제들을 대신 설득해서 신님전 신각비용을 맡아주셔서 가슴깊이 고마움이 새겨졌다. 아주버님이 사고를 당해도 소난으로 수호를 받으신 걸 듣고 그런 형님과 아주버님의 평소 심성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사고소식을 듣고 아주버님을 위해 매일 기원 드렸고, 남편은 수훈 전하러 계속 다녔다. 아주버님은 빠른 차도를 보이면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사고가 나기 전에 형님은 이사를 계획하고 계셨다. 날짜도 1218일로 잡혔다고 하시며 와서 좀 거들어달라고 하셨다. 거들어달라고 하셔도 별 생각이 없었다. 포장이사면 손이 별로 필요치 않다고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날은 전도청 월차제였다. 올해 마지막달 월차제라 빠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고, 남편도 나도 처리해야 할 다른 일도 있었다. 그래서 전도청을 참배하고 오후에나 한번 들러 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틀 전쯤 형님 전화를 남편이 받았다. 18일에 오전 7시부터 이사 시작하니 되는 대로 오라고 하신다. 다른 일이 있다고 하니, 지금까지 내가 언제 부탁하더냐고, 어머님이 친정식구는 이사하는 데 오면 안 된다고 거들지도 못하게 하고, 형이 다쳐서 병원에 있으면 동생이 와서 좀 거들어야지 어쩌라고 그러냐며 서운하다고 하신다. ‘포장이사라던데 그렇게 손이 필요한가?’싶었지만 형님이 필요하다고 꼭 와 달라고 부탁하시고, 서운하시다니 할 수 없었다. 평소에 도움도 많이 받고 사는 데 전도청에 못가더라도 가서 거들어야겠다 싶어 전도청 월차제 참배를 포기하고 다른 약속들도 연기했다.

 

이사 당일 새벽근행을 마치고 챙겨서 아침 일찍 갔다. 집에 가기 전에 아주버님이 계신 병원부터 들렀다. 혼자 식사를 하며 앉아계셨다. 앉아계시니 장골이 붙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조금씩 운동도 하시는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소변을 혼자 처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간병하는 형님에겐 큰 도움이 될 것 아닌가. 서둘러 남편이 수훈을 전하고 이사하는 집으로 갔다.

전도청에 못 가고 이사하는 곳에 가야 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되어지는 이치가 신의 이치라고 마음을 다스렸다. ‘포장이사 하는 걸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구경 잘 하겠네. 우리는 포장이사를 할 일도 없으니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겠다. 이왕하는 거 즐기면서 히노끼싱하자싶었다. 그리고 <교조일화편> 144 ‘하늘에 닿는 리를 떠올렸다.

교조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그래, 아무리 괴로운 일이나 싫은 일이라도 고맙게 여기면서 하면 하늘에 닿는 리가 된다. 또 신님께서 받아 주시는 리는 고맙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아무리 고달픈 일, 힘든 일을 하더라도 아 괴롭다, 아 싫다.’라고 불평을 해서는 하늘에 닿는 리도 불평으로 되는 거야.”라고 깨우쳐 주셨다.

고 하신 걸 상기하니 약간 설레이기도 하여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8시 약간 넘어서 도착했다. 김해에 사는 시동생도 와 있었고, 포장이사에서 여러 사람이 나와서 한창 짐을 싸고 있었다. 우리가 거들 게 있나 살펴도 별로 할 일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벽에 붙어있다시피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조금 있으니 부산에서 육촌 형님도 거들러 오셨다. 가만히 있기가 뭐해서 뭘 거들까 물어보니 이삿짐 센타 분들은 오히려 우리가 거들려고 하는 게 더 걸리적거린다고 하셨다. 여러 명이 얼쩡거리고 있으니 그 분들도 불편하셨겠지.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할 일없이 있다 보니 시간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데 왜 오라고 한 거야, 전도청 참배도 못하게!’ 싶은 불만이 스믈스믈 스며 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여기에 있으라는 게 신님 뜻이었겠지 싶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형님, 뭐 할 일 없어요?” 하니 이사갈 집으로 가서 씽크대 서랍 속에 장판지 오려 넣는 일을 하다 남은 게 있다고 그걸 좀 마무리해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이사할 집으로 갔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고 시동생이랑 우리 둘, 셋이서 하니 빨리 끝났다. 그 사이에 진동사는 작은 시누이도 오셨다.

이사짐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다. 또 할 일이 없어져서 심심하여 평소에 조언을 많이 해주는 물처럼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사하는 데 왔는데 포장이사라서 할 일이 없네요. 와 달라해서 왔지만 할 일은 없고 오히려 걸리적거리니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요.]

[포장이사가 그래. 멀거니 짐싸는 거 구경이나 하고, 간섭이나 하는 거지. 그런데 지수는 항상 뭔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은 시간낭비라고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열심히 해야 하는 데, 안 하는 뺀질이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도 많은 거 아냐?]

[글쎄요. 그래도 일없이 여기 있는 것보다 전도청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고, 그게 더 잘 쓰이는 것 같아요.]

[지금은 거기에서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도와주고 잘 쓰이는 것이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아? 왜 그렇게 뭔가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했다.

맞아, 내가 항상 뭔가 하면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는 거 맞아,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는 것도 사실이고. 또 어지간한 일은 시간낭비인 거 같아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야. 언니가 콕 집어서 이야기해주니 인정이 된다. 그리고 내 성향에 대해, 내 깊은 마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점심먹고 새집으로 이삿짐이 옮겨져 들어왔다. 사실 이때부터 손이 필요한 때였다. 그래도 씽크대 이쪽, 저쪽 서랍에 뭘 넣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집이 아니니 내 스타일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넣어라고 하니 뭘 어찌 정리해야 할지 주저하면서 내 마음대로 넣기 시작했다. 나중에 형님이 보시더니 다 꺼내서 다시 한다. ‘그렇지, 주인이 해야 할 일이지, 스타일과 생각이 다른데 내가 정리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그러다 보니 뭔가 정리하긴 해야 되고 거들어야 되는 데 척척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붕 뜬 상태에서 이리저리 나름대로 거들다가 돌아왔다. 형님은 이사떡을 하셔서 먼저 신님께 올리라고 챙겨주시고, 무슨 명목인지 모르겠지만 봉투도 주셨다. 우린 떡을 올리고 기원해달라는 것이라고 고맙게 받아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하루를 되돌아보니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은 것과 깨달은 게 많았다. 평소에 분주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 했다고나 할까. 인간관계에서도 일 중심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마도 이런 깊은 내면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요즘 내가 겪고 있는 약간의 건강상 문제도 거기서 생긴 문제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언니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화두로 맴돌아 자신에게 메아리 쳤다.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도움이 되고 잘 쓰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내 마음 깊은 속내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준 언니의 그런 충고들이 참 고마웠다.

사실 입장 바꿔놓고 봐도 이사하는 데 남편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나만 혼자 있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낯선 이삿짐 센타 사람들이 보기도 좀 그렇겠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뭔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의지가 되지 않을까.

한데 나로서는 그뿐만 아니라 뭔가 더 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고, 그건 내 욕심이었다. 옆에 있어만 줘도 의지가 되는 경우도 많은데 언제나 더 큰 도움이 되는 곳으로 내 행동의 방향을 정했던 것 같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기회비용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은연 중에 내 능력이나 힘이 더 크게 쓰이는 곳으로 이것 저것을 따져왔던 것 같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스스로 더 어렵게 만든 일도 많지 않았을까. 사소하다고 느껴지는 상대의 요청을 외면하면서 말이다.

 

옆에 있어만 줘도 상대에게 도움이 되고 잘 쓰이는 사람

이것이 화두처럼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지금까지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