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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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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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45

여덟가지 티끌과 마음청소 32

 

이 시 중

 

3) 의분(義憤)에 대해서

의분이란 불의를 보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로운 마음에서 우러나는 분노입니다. 정의를 세우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분노로써 저항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의분은 티끌이 될까요, 아니면 티끌이 되지 않을까요?

 

임진왜란의 영웅, 아니 시대를 뛰어넘는 성웅 이순신이 어릴 때 동리에서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록 어른이라도 활을 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단 이순신 같이 역사에 길이 남는 영웅이 아니라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이런 유사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집니다. 자기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남을 괴롭히거나 어려움에 빠뜨리는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다 의분이겠지요.

의분은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내 아이 같고, 내 형제 같고, 내 부모 같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목숨을 잃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할 때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몸부림쳤습니다. 이 지경으로 만든 작자들에 대한 분노와 우왕좌왕하는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분노와 아무런 힘도 보태주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도 의분이겠지요?

인질극에 참수, 길가는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폭탄 테러, 남의 나라를 깔보고 넘보고 침범하는 다른 나라에 대한 분노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분쟁 전쟁들 속에서 크고 작은 의분들이 넘쳐납니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는 펼쳐진 장()이 넓거나 좁거나 불의와 정의가 맞선 투쟁의 역사이고 분노의 용광로를 다루는 역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분노가 극점을 달했을 때는 어김없이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피를 헌납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희생과 원한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서 참으로 참담하고 안타깝습니다.

힘은 힘을 부르고, 피는 피를 불러들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비인간적인 노예를 청산하고자 자유와 민주를 추구하며 피를 흘렸지만 현대인들은 또 다른 노예와 긴장 상태에 갇혀 헤쳐 나오지를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피를 흘려서 자유를 얻었고, 피를 흘려서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피눈물을 흘려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어느 날 뒤돌아보니 또 다른 굴레 또 다른 구속이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크고 작은 분노는 모양과 색깔을 달리 할 뿐 역사에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세상은 음과 양이 공존합니다. 음이 아무리 양을 없애려 해도 없앨 수가 없고, 양이 아무리 음을 없애려 해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없앨 수 없는 것을 없애려 하니 무리를 하게 되고 삶이 덩달아 고달프게 됩니다.

의분은 마땅히 한 인간의 양심으로써 당연히 세우고 지켜가야 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의분조차 없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부작용이 드러나는 일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이 많습니다. 의분이 충천하여 원수나 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총 칼을 들이 대지만 이것으로 얼마만큼 효과를 얻었을까요. 분노는 분노를 낳을 뿐입니다. 입장이 뒤바뀌면 또 다른 이의 원수와 적이 되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는 역사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의분 분쟁, 테러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차라리 의분을 일으키는 그 에너지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위해 묵묵히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면 어떤 양상이 벌어졌을까요? 그런 가운데 길동무를 만나고, 그들과 수평으로 연대해서 새로운 가치, 새로운 문화를 꽃피게 하기 위해 진실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다면요?

소년 이순신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활을 쏘았다면 또 다른 희생자를 낳았을 겁니다. 희생자의 아들은 순신을 때려죽일 원수로 여기게 되겠죠. 뜻하지 않는 악연의 관계가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악연을 끊지 않으면 생을 거듭하면서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확대재생산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이길의 모교회가 무너지고 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충실하지 못한 교회장에 대한 의분이 하늘을 찔러 산하 유력한 교회들이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그들 뜻대로 교회장은 물러났지만 교회가 산산이 깨지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의분이 아무리 정당했다 해도 판을 다 깨버린 악연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을 터인데 이 일을 어찌 합니까? 원한 분노가 알게 모르게 가슴 가슴마다 스며들어가서 대대로 내려 갈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교조님의 가르침에는 총 칼을 들라는 가르침도 없고, 총 칼을 든 모본도 없습니다. 어떤 명분이나 의를 앞세워 반대편을 향해 폭력 투쟁 경쟁하는 모습이 없었고, 배제하거나 제외시킨 모습도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도 내 자녀라고 하시며 기꺼이 안고 함께 감로대 세상을 여시고자 하신 만인의 어버이로서 고심하신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어느 때, 교조님께서는

여덟 가지 티끌이라고 하지만, 오직 제 몸만을 생각하는 리를 통해 티끌이 되는 거야. 하지만 분노만은 그대로 바로 티끌이 되는 거야.”

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에하라 繁雄 선생의 깨우침과 강화문서에서)

 

여덟 가지 티끌 중 분노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는 자기 몸 생각, 자기 이익만을 따지는 마음, 자기를 내세우는 태도에서 티끌이 되지만 분노만큼은 그것과 상관없이 바로 티끌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분노는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바로 티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길에서는 화를 내는 정도를 보고 마음이 얼마나 맑아져 있는가를 안다고 합니다. 화는 마음의 맑기를 측정하는 잣대라고 합니다. 마음이 탁해지면 탁해질수록 짜증 분노가 많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맑아질수록 화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화를 참아 수면 아래에 깔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화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 참으로 맑아진 상태라고 합니다. 화가 가라앉아있는 상태라면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 닥치면 바로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지만 화 자체가 사라지면 어떤 외부의 조건이나 상황이 닥치더라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마음이 맑아진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기대에 맞지 않다고 화를 내고, 참다 참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폭발하고, 자기와 직접적으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서도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고 타당하지만 화를 내는 그 만큼 마음이 맑아져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의분이란 잘나고 똑똑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잘 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들은 남 따라 장에 가고, 시류에 그냥 휩쓸려 다니면서 좋은 게 좋은 거여하며 매사 가볍게 여기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정의니 불의니 투쟁이니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억압받고 소외되고 짓눌린 사람도 역시 의분이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잠재되어 있는 분노들이 동병상련을 느끼게 하여 의분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쩝니까. 분노는 어떠한 경우에도 티끌이 되어 자기 마음에 쌓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티끌을 묻혀 온통 티끌이 가득한 세상이 되게 하는데요.

 

아무리 신의 이름으로 분노를 하고, 테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으로 세상이 안정되지가 않습니다. 분노로써 분노를 다스릴 수 없고, 피로써 피를 다스릴 수 없고, 전쟁으로써 전쟁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 평화의 신, 이 세상을 안정시키는 진실한 신은 분노로써 분노를 다스리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분노, 정당한 분노 그 자체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것이 없는 인간이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의분을 화나게 만든 당사자에게 퍼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분노를 양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의분을 짓눌러 놓을 수도 없습니다. 적절한 출구를 찾아 승화시켜나가야 합니다. 격동, 개혁, 혁명이라는 거친 방식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어 가듯이 조용히 느린 걸음으로 멈춤 없이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길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찾아 하는 것이지요.

 

따져보면 모든 사건 사태에는 한쪽 일방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수가 없습니다. 원인제공자, 당하는 당사자, 체제나 시스템 모두에게 골고루 책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흔히 사건 사고가 터지면 어떤 적당한 대상자를 골라 책임을 떠넘기기고, 자기들의 책임들은 숨기거나 애써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는 문제로 남을 뿐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꽃의 색깔 향기를 각자 제 것이라 생각해서 취하려는 마음을 세상에서 분간 못하고 있어. 향기를 붙들기 어렵다 어렵다. 인간 마음의 색깔로는 아무래도 안 돼. 자아자아 화를 내어서는 안 돼. 남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해서는 안 돼. 자아자아 꽃의 색, 각자 어느 꽃의 색이냐고, 모두 의논해서 지내다오. 화를 내지 않도록. 자아자아 어떤 것을 무리로 어떻게 하라고 해도 아무것도 안 돼. 자아자아 말하면 말하는 만큼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되는 거야. 화를 내지 않도록. (1888. 7. 17)

 

각자 자기 나름대로 색깔과 향기가 있습니다. 그 색깔과 향기는 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색깔과 향기를 바꾸거나 고칠 수도 없고요. 보는 사람은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맡고 느끼면 됩니다. 이런 사정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기어이 자기 식대로 상대를 고치려고 들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되고, 상대에게도 화를 심게 되는 것 아닐까요? 각자 나름의 색깔과 향기가 있어서 다양한 세상이 되고, 그것이 서로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루어서 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잘못에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니고, 내 억울함을 묻어두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자는 말도 더더구나 아닙니다.

문제는 정의와 불의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데도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이념, 민족, 문화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준이나 잣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하는 것도 어처구니없어 보입니다.

 

각자 자기 몫만큼 책임을 지고,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그 나머지는 신의 섭리에 오롯이 맡기는 겸손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분노도 좀 더 지혜롭게 잘 다스릴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월일에게는 차츰차츰 보이는 길에 / 두렵고 위태로운 길이 있으므로 7-7

월일은 그 길을 어서 알리고 / 싶어서 걱정하고 있다 7-8

인간이 제 자식 생각하는 것과 같이 / 두렵고 위태로운 길을 염려한다 7-9

그것을 모르고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 모두 멍청히 살고 있으니 7-10

이 세상 무엇이든 만가지를 한결같이 / 월일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라 7-11

이 이야기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 이제부터 장래의 길을 두고 보라 7-12

아무리 높은산이라도 물에 잠기고 / 골짜기라도 위태로운 것이 없다 7-13

무엇이든 월일이 지배하므로 / 크다 작다 말하지 마라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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