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둘하나 114

 

세상을 바꾸는, 말 한마디 8

 

이시중

 

 

5. 글을 마치며 - 반복,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

 

자기를 용솟음치게 하고, 이 길을 용솟음치게 하고, 세상을 용솟음치게 하는 말 한마디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다. 누구나 아는 평범한 말이다. 이렇듯 단순 소박하고 평범한 말이지만 말해서 기분이 좋고, 들어서 용솟음친다. 문제는 이것을 얼마나 반복하는가 하는 것이다. 반복이야말로 일상을 만들고, 삶을 만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반복하지 않으면 한순간 기분이 좋고 용솟음치는 데 그치고 만다. 한때의 유행어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용솟음치고, 세상도 용솟음치게 하는 말은 끊임없이 계속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일상이 되고, 삶이 되고, 인연이 되고, 운명이 된다. 진실로 내 삶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 바뀌었으면 하는 방향에 맞는 가장 적확한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그 메시지를 무한 반복해서 되풀이 외친다. 반복은 정성이다. 변화를 끌어내는 진정한 힘이다. 반복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지극한 정성으로 반복하는 사이,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난다.

 

교조님께서 가르침을 전달하는 주요한 수단은 반복과 납득이었다.

친필의 주요한 메시지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거듭거듭 납득을 시키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평생 곁에 두고 수없이 되풀이 읽으라고 하셨다. 신악가는 짧고 긴 호흡으로 조화를 이루며 무한 반복하는 노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신악가 1절은 짧은 호흡으로 근행 볼 때마다 21번을 되풀이한다. 12장 노래는 긴 호흡으로 조석근행에서 여러 번 나누어 되풀이하고, 월차제 근행에서는 매번 되풀이한다. 12장 노래를 자세히 보면 두 박자, 세 박자, 네 박자, 다섯 박자로 반복하고 있다. 손춤을 출 때는 앞으로 두 걸음 뒤로 두 걸음이 기본 스텝으로 거듭거듭 반복하고 있다. 으뜸인 리에는 무한 반복되는 환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별석은 똑같은 말씀을 아홉 번이나 되풀이 듣도록 짜여 있다. 친필을 거듭거듭 읽고, 신악가 노래와 손춤을 무한 반복하는 사이 개인의 삶이 안정되고, 주변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태초의 진실이 담긴 으뜸인 리를 읽고 읽고 또 읽어가는 가운데 인간 창조의 목적인 신인화락의 즐거운 삶을 잊지 않게 된다.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어버이신님의 정성으로 우리가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매 순간 감사 속에 살게 되고, 나도 소중하고, 너도 소중하고, 그이도 소중한 존재임을 확연히 알아 존중하게 된다. 세상만사 모든 일도 그와 같이 긴 세월 견뎌야 하는 시간과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 조급하지 않고 여유로워진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누구나 형제고 남이라곤 전혀 없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고 나면, 왜 서로를 도와야 하는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깊이깊이 깨닫게 된다. 높고 낮음이 없는 평탄한 땅, 이것은 교조님께서 50년간 반복해서 걸어주신 길이고, 지금도 존명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길이며, 우리가 가야 하는 분명한 길이다.

반복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교조님께서는 몸소 보이시고, 일러주시고, 남겨 주셨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모두 다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숨을 반복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있다. 음식을 먹고 똥을 싼다. 밤낮이 반복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한다. 기울면 차고, 차면 기운다. 이러한 무한 반복이 생명 활동의 기본이고, 자연현상의 기초다. 반복이 멈추는 순간 생명의 단절, 자연의 파괴가 바로 일어난다.

 

이 길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인 대물차물의 이치를 천 번 듣고, 천 번 말하라는 말이 있다. 하루에 세 번씩 들으면 3년은 계속 들어야 하고, 세 번을 말하려면 3년은 계속 말해야 하는 횟수다. 천 번이라고 하지만 사실 천 번만이 아니라 만 번, 십만 번도 더 되풀이해야 한다는 말이며, 평생 듣고, 평생 전해라는 말이다. 그만큼 중요한 가르침이고, 반복하지 않으면 쉽게 잊힌다는 말이기도 하다. 듣기만 해서도 안 되고, 말만 해서도 안 된다. 누가 하는 말이라도 대물차물의 이치를 예사로 듣지 말고 새겨들으라는 것이고, 누구한테라도 전하여 납득을 시키라는 것이다.

사실 이 길의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대물차물을 듣고 이해하고 알고 있다. 그만큼 이 길에서는 너무나 평범한 말이다. 하지만 많은 순간 잊고 지내고 있으며, 가장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까마득히 잊은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상 사정에 쉽게 노출되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무너져버리기도 한다.

천 번 듣고, 천 번 말하라는 것은 대물차물의 이치로 촘촘하게 빈틈없이 모든 순간, 모든 사물과 모든 주변 환경에 비추어서 바라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촘촘하게 빈틈없이 대물차물의 이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고 헐겁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허점투성이다.

대물차물의 이치는 몇 번 들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몇 번 들려주었다고 해서 잘 실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물차물 하나만 해도 천 번을 듣고 천 번을 말하라 하는데, 그것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 외 이 길의 핵심적인 가르침도 그렇게 하라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천 번을 듣고, 천 번을 말해야 할 이 길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 친필에서 그 실마리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 세상 안정시키는 진실한 길 6-4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만가지를 서로 도와갈 뿐이다 13-37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 청소야 16-57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오직 감로대를 향한 길 17-2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 세상 안정시키는 진실한 길이고, 만가지를 서로 도와가는 길이고, 온 세상 사람들 가슴 속을 청소하는 길이고, 오직 감로대 정신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 길에 대해 참으로 쉽고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요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평소에 얼마나 깊이 새기고 있을까? 몇 번이나 듣고, 몇 번이나 전하고 있을까?

진실로 이것이 우리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다면, 전 세계가 코로나 상황으로 위기로 내몰렸을 때, ‘이 세상 안정시키는 진실한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더 당당하고 더 자신 있게 외치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겁을 먹고 위축되었다. 가장 필요한 시기에 숨어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평소보다 더 열렬하게 이 길을 알려야 할 시기에 외면했다. 남들의 비방 조롱을 들을까 봐 비겁했다. 그만큼 우리는 평소에 이 가르침을 천 번을 듣지 못했고, 천 번을 말하지도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슴 깊이 새겨져 있을 턱이 없었고, 가장 필요로 한 시기에 행동으로 나오지 못하고 허둥대며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정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써 가르쳐주신 근행도 소홀히 했다.

그 외도 핵심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소에 얼마나 자주 듣고 얼마나 자주 말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에 따라서 일상생활이 달라지고,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태도도 달라지게 된다.

 

코로나 사태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사이에 전쟁을 보면서 이 길을 생각해 본다.

생명의 근원이신 어버이신님께서 교조님을 통해 내신 이 길이 아직도 세계종교다운 종교가 되지 못하고, 이 길의 가르침이 세상을 담당하는 중심 가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참 안타깝다. 이 길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종교가 되고, 이 길의 중심 가르침이 세상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직도 세상은 이 길을 모를 뿐 아니라 이 길의 중심 가치도 더더구나 모른다. 이것이 그저 안타깝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남들은 고사하고 우리 역시 이 길을 온전하게 알고나 있을까? 이 길의 핵심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을까? 매 순간 실천하고 있을까? 무한 반복해서 듣고, 무한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을까? 이것을 생각해 보면 온전하게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그리고 꾸준히 발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가 없다.

자나 깨나 이 길의 핵심가치를 생각하고, 듣고, 말했으면 좋겠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반복했으면 좋겠다. 그것도 한 사람을 넘어 열 사람, 열 사람을 넘어 백 사람, 천 사람이 반복한다면...... 이것만이 희망이고, 새로운 길을 여는 유일한 길이지 않을까? 이 길의 중심 가르침을 반복하지 않으면, 이 길의 중심 가치는 사라지고, 어느새 사람 중심, 건물 중심, 조직이나 체제 유지, 편가르기 논리에 빠져버리고 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변화와 개혁, 대전환! 이것은 코로나 시대를 통해 어버이신님께서 전 인류에게 던지는 강력한 요구로 이해되었다. 개인이든 이 길이든 세상이든 마찬가지다. 새로운 길의 모색은 지극한 정성으로 하는 것이다. 한두 번 생각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말 몇 번 툭 던졌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한두 번 다른 몸짓을 했다고 해서 되는 것도 더더구나 아니다. 반복이다.

변화와 개혁, 대전환의 시대에도 지속해서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시대 언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공감의 언어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난 뒤 이내 잊어버리고 마는 메시지로써는 안 된다. 그것은 한때의 유행어일 뿐이다. 변화와 개혁, 새로운 대전환을 이끄는 메시지는 한때의 유행어일 수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해서 거듭 반복되어도 싫증 나지 않는, 살아 숨 쉬는, 말해서 기분 좋고, 들어서 용솟음치게 하는 말 한마디일 것이다.

이 시대가 변화와 개혁, 대전환의 시대라면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는 신과 인간이 함께 용솟음치는 신인화락의 즐거운 삶이라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으뜸인 리가 그것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그것이 내 삶의 중심, 이 길의 중심, 세상의 중심 가치로 우뚝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실질적인 변화, 진정한 개혁, 올바른 대전환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어버이신님께서 여기까지 따라오라고 하시는 그 임계점이 있으니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임계점에 다다르기 전에 포기해 버린다. 그래서 개인 차원이든 전 지구적 차원이든 실질적인 변화, 의미 있는 변화를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용솟음치게 하고, 세상을 용솟음치게 하는 말 한마디는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람이 없다.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반복해야 한다. 이것이 개인의 삶을 바꾸고, 이 길의 모습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길이다.

 

말 하나가 용재의 힘(1895. 10. 7)이라 했다.

그러므로 무릇 용재라면 말 한마디 조심스럽게 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스스로한테 하는 속말이든 남한테 하는 겉말이든 마찬가지다. 말은 침울하게도 하고, 용솟음치게도 한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래서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을 살펴보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그것도 늘 살펴보고 점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말을 바꾸면 내 삶을 바꾸고, 이 길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