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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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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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4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13

 

이시중

 

10. 한국전도청 성립과정, 그리고 과제

 

음으로 양으로 한국 내 천리교 형성 과정에 오랫동안 깊이 관계하며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국전도청 역사를 잠시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해방 전 조선포교관리소는 지금의 한국전도청전신입니다.

조선포교관리소1911년 서울에 설치되었는데, 그보다 2년 앞서서 부산에 설립된 한국포교관리소를 그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청 역사가 110년을 넘었습니다.

조선에서 최초의 포교 활동은 교회본부나 교회 차원의 지원 없이 밀항선을 타고 온 개인의 신앙 신념과 노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 한국에서는 종교에 관한 통감부령이 생겨서 천리교 교회본부도 한국에 있는 신도들을 보호하고 가르치고 지도 육성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본부에서 마츠무라 키치타로(松村吉太郞)를 초대 관리자로 임명하고 통감부의 인가를 받아 그 이듬해 19094월에 마츠무라가 부산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마츠무라는 먼저 각지의 포교 실정을 파악하고, 포교사를 한국포교관리소에 모아 보호하면서 지원하다가 전도의 편의상 관리소를 서울로 이전합니다. 이때 한국포교관리소조선포교관리소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포교관리소가 생기면서 그 이전에 각자 전개하던 전도 활동을 비로소 교단이 주도하며 관리하고 이끌게 됩니다. 191910월에는 조선인 포교사 양성을 위한 일환으로 천리교조선교의강습소’(6개월 과정)를 관리소 내에 설치합니다. 하지만 10년 동안은 처음 취지와는 달리 수강생이 거의 일본인이었고, 1929년에 가서야 조선인만을 수강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강습소 출신 조선인 포교사들의 활약이 이후 한국포교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활동에 의해 해방 직전까지 211개소에 달하는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고, 그동안 형성되었던 조선포교관리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교회는 적산이라는 딱지 아래 몰수당하고, 일본인 교직자·포교사·신앙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쫓겨가며 철수합니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한국인 포교사와 신앙인들은 격렬한 반일감정의 시대적 흐름 속에 탄압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결국 숨어지내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대와 지역과 이념을 초월한 보편적인 교조님의 모본과 순수한 가르침은 한국인 신앙인의 가슴 깊숙이에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신앙신념을 가졌던 한국인 초대 신앙인들은 불굴의 정신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해방 후 2~3년 지나는 사이 다시 교세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누구의 지원이나 도움 없이 개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열성으로 이룩한 놀라운 수호였습니다. 더군다나 해방 직후 천리교의 모든 기반은 모두 무너지고, 천리교인들은 매국노, 친일파라 몰리는 반일감정의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이룩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5·16 혁명 후 새 정부가 들어서자 사회단체 등록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한천리교총본부’(교통 김진조)는 등록을 하게 되지만 진해를 중심으로 한 대한천리교연합회가 종교단체 등록을 실패하게 됩니다. 이미 천리교가 단체등록되어 있으니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연합회 측에서 전도청 개설 움직임이 대두되었고, 1961623일에 주사회의를 거쳐 연합회는 해체하기로 하고 대한천리교전도청’(청장; 이와다 조자부로 岩田長三郞)을 결의하게 됩니다. 이에 참여한 주사로는 김기수, 최재한, 김순염, 김태봉입니다. 자주교단 기치를 내걸고 있었던 대한천리교총본부교통인 김진조는 여기서 빠져있습니다.

해방 이후 전도청 개설 움직임이 이때 처음으로 공식화되었지만 대한천리교전도청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공인받은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전도청이라든지 주사회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미 그 전부터 교회본부와 인적 교류나 연락이 아주 긴밀하게 오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나 포교소의 대부분은 노선 자체가 서로 다른 대한천리교연합회대한천리교총본부에 동시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 눈치를 보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정부에 정식 등록되지 못한 대한천리교연합회는 당연히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고, 필요에 따라 대한천리교총본부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19631014일에는 이사장 김진조로 하는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단’(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107-1번지, 이사장 김진조)도 설립인가를 받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967년 나카타 다케히코(中田武彦)가 해외포교전도부 한국 담당(8대 관리자)이 됩니다. 19377대 관리자 이와다 조자부로 부임 이후 30년 만에 한국 담당자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해방 전 조선포교관리소에 안치되었던 목표님은 본부에 반납되거나 없애버리지 않고, 해방 전 마지막 관리자인 이와다 조자부로 자택(천리시 소재)에 모시게 되었고, 조선에서처럼 매달 14일에 월차제를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려 십여 년간 계속 이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카타 다케히코가 한국 담당으로 있는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19731123일에는 대한천리교단과 협의 없이 최재한, 김기수, 김순염 3인을 위원으로 하는 대한천리교최고협의회’(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1121-3)를 발족하고, 그 업무를 관장하는 중앙사무국’(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33-90)을 둡니다. 이로써 한동안 같은 교회나 포교소에 대한천리교본부에서 공문이 내려오고, ‘중앙사무국에서도 따로 내려보내는 공문을 동시에 받게 되는 기이한 혼란 상태가 이어집니다.

중앙사무국이 있는 충정로 33-90번지에, 1975726일 해방 후 처음으로 조선포교관리소한국전도청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고, ‘포교관리자전도청장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 전후로 하여 원전과 교의서 들이 착착 번역되어 출간합니다. 1973년에 신악가, 1974년에 천리교교전, 고본천리교교조전, 1977년에 고본천리교교조전일화편, 지도서발췌, 1978년에 친필이 한국어로 번역 발간됩니다. 그리고 제의식, 악기, 손춤, 교의 따위 강습회가 잇따라 열려 신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게 됩니다. 그리고 그전부터 운영하고 있었던 교의강습소1974년부터 정식으로 교회본부에서 인정하여 그 위치를 부여받습니다.

대한천리교최고협의회19791122일에 해산되고, 그에 따라 중앙사무국의 기능은 대한천리교단교무원으로 이관합니다. 최고협의회와 중앙사무국의 기형적인 운영은 결코 한국전도청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81326일에 9대 전도청장으로 하루노(春野喜春)가 임명을 받아 1112일에 서울특별시 강남구 잠원동 한신아파트 3201002호 청장 사택으로 합니다.

198429, 충정로(33-90)에 모셔져 있던 전도청 준목표님을 청파동(1121-3)으로 무단으로 옮기는 일이 일어나고, 1984817일 교단본부 청사 역사를 한다고 교통이 전도청 준목표님을 다시 청파동에서 충정로로 옮기는 일이 생깁니다.

1986112일에는 충정로에 모셔져 있던 전도청 준목표님을 청장 사택(서울특별시 강남구 잠원동 한신아파트 3031811)으로 이전합니다. 이후 청장 사택이 옮겨가는 데마다 전도청이 옮겨져 갔습니다. 전도청의 아파트 시대가 한동안 이어집니다.

 

한국에서 이 길의 모습은 항상 안팎으로 끊임없는 도전과 공격에 시달려 이합집산하면서 부침을 거듭해 왔습니다. 참으로 천리교가 이 땅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태생적으로 천리교가 안고 있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을 강압적으로 식민지배했던 일본, 그 일본에서 발생한 종교, 한때 강압에 의해 일본 군국주의에 편승하여 식민정책에 협력한 신도로서 천리교. 이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큰 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는 정부대로 사사건건 천리교를 간섭하고 통제하면서 성장을 가로막았고, 교회본부는 교회본부대로 해외포교전도부와 전도청을 통해 터전의 리와 상급의 리를 앞세워 예전의 관리와 통제 속으로 한국 교단을 하루속히 예속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사회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시시때때로 반일 감정을 앞세워 발목을 잡거나 찬물을 뒤집어씌우며 천리교 성장을 경계하면서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시대를 읽는 힘도, 세상을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도, 전체를 담아내는 능력도 부족하여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라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를 겪고, 한국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겪고, 병이나 사정으로 죽을 고비를 넘어왔으니까 그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습니다. 거기다가 자기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 같은 천리교가 정부로부터 사회로부터 온갖 지탄을 받아내야 했으니 그 피해의식은 오죽했겠습니까?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습니다. 옆도 뒤도 돌아볼 틈도 없이 그냥 앞으로만 치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경험했던 방법이 최상이었고 최고였습니다. 그 외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고, 타협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이 처한 처지와 시대적 상황과 주변국의 정세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고, 앞으로 나아갈 좌표와 방향을 잡기에는 미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안팎의 여러 사정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모처럼 형성되어 가던 교단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스스로 모순에 빠지거나 이래저래 공전을 거듭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1988재단법인한국천리교연합회’(1996913재단법인한국교단으로 이름을 바꿈)가 정부에서 공인받는 단체로 결성되면서 기존에 있던 대한천리교교단과 완전한 분열의 길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원망하면서 말이지요. 한국교단은 터전의 리와 상급의 리를 중시했고, 대한교단은 자주·자립·토착화를 강조했지요. 한국교단에는 자주·자립·토착화라는 말이 사라져버렸고, 대한교단에서는 터전이나 일본 상급교회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쪽을 버려야 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둘하나의 리로써 모두 필요한 가치입니다. 이것을 55부로 살려내는 것만이 이 길이 진정으로 이 땅에서 뿌리 내리는 길이 될 것이고, 차후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단단한 반석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도청에 기대하는 역할은 이 두 가치를 동등하게 살려내는 둘하나의 리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편 2001년에 야기대교회를 통해 경남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1094-6에 위치한 원남성교회 건물과 토지(3만평) 일체를 한국전도청으로 써 주십사하는 의도로 교회본부에 기증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에 따라 20029월 서울 신반포 궁전아파트에 모셔진 전도청 준목표님을 김해 생림면으로 이전하고, 10월에 마에가와 요시미청장이 임명되어 취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2003년 전도청 목표님을 재하부 받아 710일 진좌제를, 11일 봉고제를 집행합니다. 이로써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전도청사가 정식으로 설치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에 반쪽짜리로서 아직도 온전한 전도청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내 천리교인들의 전체 역량을 모아서 생겨난 전도청사가 아니라 분규에 분규를 거듭하던 원남성교회가 마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단독으로 결행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쪽에 반쪽인 전도청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전체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하나의 사업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전도청이 풀어야 할 큰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단법인 천리교한국교단2002822일 진해에서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전도청 자리로 이전하여 전도청과 함께 동거를 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교단은 대외적으로 한국정부와 관계하는 단체로 행정적인 차원이고, 전도청은 대외보다 대내적인 본부와의 창구 역할을 하는 신앙적인 차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한국교단과 한국전도청이 계속 이원화 체제로 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원화되어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땅에 천리교가 전해진 지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청장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 본부원에 한국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점, 3원전 중 지도말씀이 아직도 완역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하고 있다는 소식도 없다는 점도 한국전도청이 풀어가야 할 큰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한국은 세계종교로 가는 관문이고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리교는 여전히 한국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 제대로 통하지 않는 종교라면, 세계종교라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가르침 자체는 훌륭하고 보편적인 세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체제나 제도가 보편적이지 못하고 세계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천리교가 세계종교로서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한국은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한국은 종교백화점입니다. 세계종교가 다 한국에 들어와 있고, 그중에 화려하게 꽃피운 유교, 불교, 기독교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신명나는 곳은 한국입니다. 온갖 종교, 철학, 사상, 이념이 갈등하고 경쟁하고 넘실거리는 곳이 한국입니다. 천리교를 한국에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것은 곧 천리교를 세계종교로 확인시키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 천리교를 세계종교라 하면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천리교가 세계종교로서 한국에 관통하게 하는 것, 그것도 전도청의 큰 역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청이 단순히 교회본부 입장을 알리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에 머물러있다면 절름발이 전도청이지 온전한 전도청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전도청의 역할이 크다 하겠습니다. 역시 전도청은 전체를 볼 수 있는 눈, 전체를 담을 수 있는 그릇,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르게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교단이 완전히 갈라선 지도 30년이 넘고 있습니다. 이쪽저쪽 둘 다 교세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누가 간섭하거나 방해를 하지 않아도 천리교는 스스로 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상상력도 창의력도 없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지극한 정성도 상실한 듯 보입니다. 이제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이내 사그라질 불꽃처럼 희미하기만 합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몇 해 전 터전의 감로대가 쓰러졌고, 그 이듬해 진주님이 쓰러지셨고, 그다음에는 코로나19가 순차적으로 찾아왔습니다. 지금 이 길은 안팎으로 여러 가지 암울한 마디가 겹쳐 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마디는 대전환의 시기라는 것을 말해 주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지켜야 할 것 반드시 지키고, 바꿔야 할 것은 과감하게 바꿔가라는 신호이겠지요. 끊어야 할 것은 끊고, 이어야 할 것은 잇고, 막힌 곳을 뚫어낸다. 이것이 마디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인이든 가족이든 국가든 종교든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 위치해서 해야 할 몫을 찾아서 해야 하지만, 동시에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고, 전체 역량을 하나로 모아 나가는 분명한 방향성을 바로 잡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