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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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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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2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11

 

이시중

 

 

9. 교단의 성립과 분열, 이합집산, 그리고 분단 고착화 1

 

한국에서 최초 교단이라 할 수 있는 천리교조선포교관리소는 앞서서 말했듯이 종전과 더불어 미군정과 기독교에 의해 빼앗기고 폐쇄가 됩니다. 천리교라는 이름으로는 더는 자유로운 종교활동 자체가 어려웠고, 대부분 재산도 미군정에 의해 몰수되어 기독교에 넘어가고, 세간의 험악한 분위기에 밀려 교회나 포교소가 사라져 갔습니다. 결국 신앙인들은 숨죽여 뿔뿔이 흩어졌고, 이대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신앙적 확신과 열정을 지닌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다시 서서히 부활하는 계기를 맞이합니다.

 

김기수가 중심이 되어 1947년에 천리교연합회가 생기고, 19481014일에는 이순자, 김태봉이 중심으로 천경수양원(天鏡修養院)’(서울시 종로구 소격동)도 결성합니다. 천경수양원은 공보처 제325호로 사회단체 등록 허가까지 받습니다. 이것이 해방 이후 최초로 등록된 허가단체였습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천리교라는 이름을 내세우지 못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활로를 찾아가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천리교도 1950년에 불어닥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전쟁은 또 한 차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19521214일에 천경수양원을 모태로 33인이 발기인이 되어 대구에서 대한천리교연합회(회장; 김진조, 명예회장; 김선장, 부회장; 김점이, 총무; 김태봉)를 결성합니다. 해방 후 흩어지고 숨어 지내던 교인들에게 큰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길의 원로 선배들은 힘과 용기를 내어 다시 활동을 재기하며 몸부림쳤습니다.

다음 해 19534월에 천리교연합회’(회장; 김기수)와 결합하기로 하고, 19541014일에 대한천리교연합회대한천리교본원(초대원장; 김진조, 부원장; 김점이)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195543일 김태봉, 김순염 등이 대한천리교본원에서 이탈하여 진해시 여좌동에서 대한천리교 교리실천회’(회장; 김태봉)를 발족하고, 414일에는 김기수, 김선장, 김점이 등이 대한천리교본원을 이탈하여 대한천리교연합회’(회장; 김기수)를 또다시 결성합니다.

이로써 최초로 교단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르고, 그것이 극으로 치달을 때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주요한 쟁점은 일본 교회본부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 나가느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부류는 자주독립하자는 것입니다. 교단의 주류세력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본부와 연결하고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태봉, 김순염이 주축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 계통을 유지하면서 연합형태로 하되 대외적인 창구만 일원화하자는 것입니다. 김기수, 김선장, 김점이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천리교가 일본에서 발생했고, 한국인이 일본에 의해 36년간 지배를 받은 피지배인으로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한 이런 갈등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쉽게 분열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한 예가 있습니다.

1956126일에 대한천리교본원에서 열린 춘계대제 진행 모습입니다. 우선 춘계대제는 진흥대제전(振興大祭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순서를 살펴보면, 개회사, 국민의례, 애국가 봉창, 교지 낭독, 교가 봉송, 교통 등단, 대제 고사, 국군장병 위령 고사, 애도가, 근무(팔수까지/ 박자, ), 교통 인사 및 설교, 내빈축사, 실천요강 제창, 경축가, 만세삼창, 교통 하단, 폐회사.

오늘날 교회본부에서 올리는 정통 제전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제전의 중심이 근무(근행)인 터전파가 볼 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편 처지에서 보면 해방 후 친일파, 매국노로 몰리는 현실에서 고육지책으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 짐작은 합니다. 조금 놀라운 것은 교통이 입장할 때 누른 도복을 입고 나와 마치 교주처럼 비치게 하여 권위를 나타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당시 몇몇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었을지 모르지만, 의식 있는 대부분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956414대한천리교본원대한천리교총본부로 개칭하고, 61일에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79번지로 이전합니다. 임원으로는 교통(이때부터 교단장을 교통이라 함)에 김진조, 교정부장에 최우조(최재한), 교화부장에 김태봉, 심사부장에 김기수입니다. 말하자면 앞서서 교단에 이탈했다는 김태봉, 김기수가 나란히 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줏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무리는 갈팡질팡하기 마련이고 너무나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1958624일에는 경남 진해시 여좌동에서 따로 대한천리교연합회’(연합회장; 최재한)가 결성되고, 연합회 신전, 강당, 기숙사, 식당 역사를 추진하게 됩니다. 부지는 진해교회가 제공하고, 목재 일체는 고성교회에서 담당합니다. 해방 후 나름의 최초 교단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전 교인들이 참여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반쪽 역사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교의강습은 1955년 서울에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열린 후, 부산, 대구, 마산으로 순회하였고, 6기부터 진해에서 하면서 일원화된 것입니다. 초대 강습소장이 김기수입니다. 그래서 새 역사가 이루어진 뒤 195971815기부터 교의강습소가 진해에 안착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역 안배와 편의라는 이름으로 1962년 서울 혜성교회에서 서울교의강습소가 만들어지고, 1967년 부산 동삼동 원남성교회에서 부산교의강습소를 또 만들면서 이마저 통합 구실을 하던 진해 교의강습소 역할도 약화되고 맙니다. 원래 교의 강습을 한군데 통합하여 일원화하려고 했던 것은 응집된 힘을 길러 앞으로 학교를 비롯한 새로운 큰 사업을 하자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교세를 지녀 힘 있는 교회가 앞서서 교의강습소를 분리해 나감으로써 이 꿈은 기약할 수 없는 먼 뒷날로 밀려났고, 오늘날에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각 교회들의 외형적인 덩치는 커졌지만, 교세는 이미 훨씬 더 약화되어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1961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납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을 힘으로 억누르며 들어선 박정희 정권.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정비하는 가운데 사회단체 등록법이 개정되어 천리교도 종교단체로 다시 등록하라는 통보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때 서울 쪽에서는 대한천리교총본부’(교통; 김진조)라는 명칭으로 19611211에 사회단체 재등록(문교부 제184)에 성공하지만 진해 쪽 대한천리교연합회는 사회단체 등록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대한천리교연합회는 해산하고, 정부 공인단체인 대한천리교총본부라는 우산 아래 다시 모일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대한천리교총본부에서는 재단법인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재한, 김기수, 김순염이 각 5백만 원을 내고, 나머지 5백만 원을 내어서 2천만 원을 기본재산으로 하여 19631014일에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단이라는 이름으로 법인설립 인가(이사장; 김진조,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107-1번지, 문교부허가 제111)까지 받습니다.

이즈음 몇 년은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단아래 모두가 모여 한때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대한천리교단을 이탈하여 1970414일에 김기수 중심으로 대한천리교교회연합회’(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1121-3)가 재창설하고, 1971218일에는 김태봉, 김순염, 조문봉이 이탈하여 진해에서 대한천리교실천회’(회장; 조문봉)가 생겨났습니다.

이리하여 한때 한배를 탔던 교단은 세 갈래로 또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완전히 이탈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양쪽을 걸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대외적으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공인된 단체 이름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이탈은 전체적인 힘을 빼는 일이며, 대내외적으로는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 됩니다.

1967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천리교 신자가 37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단이 분열되니 그 많은 신자를 하나의 에너지로 결집할 수가 없고,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도약의 발판도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신앙인으로서 자괴감을 느끼고, 신앙신념에도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여 19731123일 최재한, 김기수, 김순염을 최고위원으로 하는 대한천리교최고협의회’(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1121-3)를 결성하고, ‘중앙사무국’(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33-90)도 설치를 하게 됩니다. 이때 4개 교구가 설치되는데 서울 제1교구, 2교구, 부산교구, 영남교구입니다. 이 교구는 지역에 따른 구분보다는 최상급교회의 위치에 따라 묶여 졌습니다. 예를 들면 원남성교회 산하는 고성에 있으나, 대구, 진주에 있으나 부산교구 소속인 셈입니다. 이것은 결국 원남성교회파, 혜성교회파, 그 외 교회파로 분열을 더욱 가속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암암리에 서로 교세를 자랑하거나 아니면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교단 통합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지역에 무관심하게 되고, 같은 지역에 있는 용재들과의 연대감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천리교총본부가 있는데, 왜 굳이 대한천리교최고협의회가 있어야 하는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으며 석연치가 않습니다. 오히려 교단의 분란을 키우고 더욱 깊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상태로 몇 년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19791122일 최고협의회와 중앙사무국이 폐쇄되고 대한천리교본부로 다시 통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01113일부로 계통별 활동을 지역별 활동으로 교구가 개편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존 교구 제도는 19801230일부로 자동해체되고, 신 교구 제도를 198111일부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8개 교구로 나누어졌는데 서울, 경기, 충청, 호남, 경북, 부산, 경남, 제주교구입니다. (계속)

 

*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사실을 제대로 알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그나마 있는 자료 조차도 날짜와 내용이 서로 다르게, 혹은 뒤섞여 기록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고 서술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편중, 왜곡되었거나 미진한 부분도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연재를 계속 이어나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행여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을 수 있도록 연락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 참고문헌

대한천리교사2(정명수), 나의 천리교(김태봉), 리의 세계(허태규), 천리교사전,천리교한국전도청사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