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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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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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0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9

 

 

이시중

 

8. 한국전쟁 전후에서 한일협정 전후까지 2

 

1960년대 초에 벌써 해방 전 교세를 능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먼저 해방 전부터 국내에서 신앙을 이어온 신념이 굳센 포교사들이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해방 후 살벌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신앙 신념을 잃지 않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신앙적인 열정을 되살려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국내로 유입된 열정적인 한국인 포교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 있을 때 본인이나 가족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신상 사정에서 뜻밖에 이 길의 가르침을 듣고 도움을 받았던 포교사들입니다. 이들의 포교 열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해방 후 혼돈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중들은 헐벗고, 병들고, 지치고, 찌들어서 삶의 의지와 희망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민중들에게 천리교 포교사들은 열정적으로 다가가 으뜸인 신을 알리며 삶의 의지와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이것이 해방 직후 거의 사라진 천리교를 다시 일으켜 1960년대 초에 이미 해방 전 교세를 능가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 신앙적인 열정만으로 일구어낸 기적이었습니다.

 

한편 사람을 모으고 결속하려면 조직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정부로 인정받는 교단도 필요하게 됩니다. 해방 후 나라가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이 길의 원로들도 새로운 천리교를 꿈꾸며 다양한 천리교인들의 모임체를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천리교교회본부와 연결하여 조선포교관리소 같은 것을 살려내자는 흐름입니다.

두 번째는 자주·자립하는 독립교단을 만들자는 흐름입니다.

세 번째는 계통이 나누어진 개개 교회들을 조합처럼 모아 연합회를 구성하자는 흐름입니다. 이 연합회를 통해 필요한 활동을 함께 하고, 대외적으로도 함께 대응하자는 것이지요.

 

첫 번째 흐름을 주도한 사람은 김태봉(대구교회 초대)입니다. 김태봉은 이순자를 원장으로 하여 천경수양원을 설립합니다. 이들은 마지막 조선포교관리자인 이와다조사부로와 친분이 있는 분들로 해방 직전까지 조선포교관리소와 교의강습소와 관계했습니다. ‘터전 연결파라 할까요.

두 번째 흐름을 주도한 사람은 김진조(경심교회 초대)입니다. 김진조는 이순자 천경수양원 초대원장에 이어 2대 원장으로 추대됩니다. 이때 부원장으로 김점이(부산교회 초대)가 맡습니다. 김진조는 6·25 전쟁으로 어수선하고 흩어진 수양원을 정비해 나가면서 평소의 신념인 자주·자립하는 독립교단을 만들 것을 천명합니다. 이후 천경수양원을 기반으로 한 33인이 주축이 되어 대한천리교연합회19521214일에 결성됩니다. 이때 김진조는 회장이 되고, 김선장(미선교회 초대)은 명예회장이 됩니다. 김진조는 교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관리 운영하는데 경심교회 재산뿐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논밭과 양조장까지 팔아 그 경비를 조달하고 스스로 가난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자주 독립파라 하지요.

세 번째 흐름을 주도한 사람은 김기수(혜성교회 초대)입니다. 김기수가 독자적으로 주도하여 19475월에 천리교연합회를 결성합니다. 김기수는 각급 소속 계통에 따른 상급의 리를 인정하되 이들 교회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활동하고 대외적으로도 공동 대응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교회 연합파입니다.

 

19534월에 김기수가 주도한 천리교연합회와 김진조가 주도한 대한천리교연합회가 처음으로 통합에 이릅니다. 이것이 19541014일에 대한천리교본원으로 이름을 바꿔 원장을 김진조로 하고 본부를 서울에 두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래 가지 못하고 김태봉, 김순염(진해교회 초대) 등이 대한천리교본원을 이탈하여 195543일에 진해시 여좌동에서 대한천리교 교리실천회를 발족합니다.

그리고 김기수, 김선장, 김점이 등이 이탈하여 같은 해 414일에 대한천리교연합회를 결성합니다. 이렇게 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통합된 교단 모임체가 거의 2년 만에 최초로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후 대한천리교본원1956414대한천리교총본부라고 개칭하고, 다시 1959414대한천리교본부로 개칭하였다가, 19611211일에 대한천리교총본부로 다시 개칭합니다.

그런 가운데 뒤늦게 일본에서 귀국하여 맹렬하게 포교를 전개해 간 최재한(최우조)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몇 년 사이에 매우 놀라울 정도로 교세가 형성되니 원남성교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흐름도 생겨납니다. 천리교의 진로에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처음으로 교회본부의 공식 초청으로 한국 교우 대표 6인이 1961423일에 터전 귀참을 하게 됩니다. 대한천리교본부 교통 김진조, 대한천리교교회연합회 회장 김기수, 대한천리교연합회 회장 최재한의 부인인 이맹순, 교정부장 김태봉, 동광교회장 배대봉, 진해교회 나상기가 그들입니다. 이맹순은 대한천리교연합회 회장인 최재한이 자유롭게 일본으로 갈 수 없으므로 대신 간 것이고, 나상기는 진해교회 후계자로 교회장인 어머니를 대신으로 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한국 천리교의 크고 작은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쟁쟁한 분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교회본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터전 귀참하게 되었다면 이미 교회본부에서는 한국에서의 갈등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 구조를 해소하고 단합하기를 바라면서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중에 한국 정부에서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천리교본부이고, 천리교 교회본부에서 심정적으로 인정을 받은 쪽은 대한천리교연합회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천리교교회연합회는 반반에 걸친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원로들의 생각과 이념들이 겉으로 합치는가 싶어도 속으로는 쉽게 좁혀지지 않아 이후 흐름이 계속 요동치게 됩니다. 사안이나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 확대 재생산 혹은 반복되어 갑니다. 한때는 합치고, 또 한때는 헤어지고, 이해관계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1986614대한천리교단에서 경남교구를 해산하고 교구장 이동규(선화교회 초대)를 해임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어서 623일에 부산교구 폐쇄 조치까지 내려집니다. 여기에 반발하여 618일 진해에서 한국천리교연합회를 결성하고, 625대한천리교단에 결별을 통보합니다. 이로써 대한천리교한국천리교로 갈라지면서 완전 고착화의 길로 접어듭니다.

(대한천리교사2정명수, 46-68, 201-212/천리교한국전도청사연표32-52/천리교사전1024쪽 참조)

 

위에 언급한 흐름은 어느 한쪽을 취하고 다른 쪽을 버릴 수 있는 흐름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리교가 천리교인 이상 발상지인 교회본부와 완전히 절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랜 세월 동안 국가신도에 의해 왜곡되고 변절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수도 없습니다. 본부와의 원활한 관계와 연속도 필요하고, 한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주·자립하는 독립 교단으로서 면모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에 치중하느냐에 따라서 저울추가 기울기 마련입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바람직하지도 못합니다. 활짝 열어 넓게 포용할 때는 하나가 되지만, 좁게 닫혀버리면 둘 셋으로 한없이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서너 가지 흐름을 보면서 천리교가 한국에서 온전하게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런 갈등과 흐름은 근본적으로 천리교 자체의 모순과 한국 일본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천리교의 발상지가 일본이고, 일본은 한국을 강압적으로 식민지배한 나라입니다. 물론 천리교 자체도 일본 권력자로부터 억압과 탄압을 받은 긴 역사가 있습니다. 그만큼 왜곡과 변절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다행히 종전 이후 2대 진주님의 노력으로 많은 부분에서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리 해석이나 조직, 체제에서 교조님의 원래 가르침이 온전하게 다 복원되었는지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의문입니다. 이런 의문을 풀고 해소해나가야 하는 과제를 천리교인들이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 놓여있는 문화의 장벽이 높고, 풀어야 하는 역사의 부채 의식도 깊고 무겁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겹겹으로 쌓인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모순의 극복 없이 천리교가 일본에서 새롭게 꽃피어나기가 어렵고, 한국에서도 진정으로 뿌리내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리교가 한국에서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천리교는 더는 세계종교로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한국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종교가 어떻게 세계종교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은 천리교가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발판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아주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다르고 다릅니다. 물과 불처럼 다르고,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그러나 세계 어떠한 종교도 그 지역과 배치되는 종교문화로서 그 지역에 뿌리내린 예는 없습니다.

천리교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온전하게 뿌리내리고 꽃 피우기 위해서는, 그래서 세계종교로 확실히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한국과 일본의 너무나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55, 둘하나의 이치로 풀어나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천리교가 세계종교로서 진정 우뚝 설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계속)

 

 

- 8월호에 오타가 있어서 바로 잡습니다. 세밀하게 살피지 못해 죄송합니다.

1. 19쪽 밑에서 16‘313‘1214

2. 19쪽 밑에서 14‘1953‘1954으로

3. 21쪽 밑에서 12, 3근행이 제일이야오직 근행뿐이야로 고칩니다.

 

- 천리교 역사에 관한 자료가 있으신 분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필요한 자료 부족으로 글쓰기에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