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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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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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6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5

 

 

이시중

 

5. 3·1 독립운동 전후부터 1945년 광복 전후까지(3)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한국 민중의 분출하는 분노에 놀란 일본은 그동안 탄압 일변도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분위기를 바꾸면서 음으로 양으로 친일파 양성을 시작하였습니다. 친일 정도에 따라 한국인을 차별 대우하는 방편으로 사용하였지요.

이것은 곧 종교정책에도 변화가 있었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천리교에도 영향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3·1 독립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한국에서 친일파 한국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주 시급한 당면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천리교단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전부터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천리교 포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인 신자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생겨난 신자들은 교회본부의 지원이나 그 어떤 포교 지원센터에서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순수한 개별 단독 포교자들의 열성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동안 종교시설에 대한 것은 모두 허가제였으나 1920년 이후 신고제로 완화합니다. 그 대신 조선총독부는 일본 국내에서 시행하던 삼교 회동 정책을 도입합니다. 이것은 국가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서 종교단체를 차등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교회본부에서도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정식으로 교의강습소 개설로 나타납니다. 100명 수용이 가능한 천리교 조선교의강습소가 교회본부의 관심과 지원 아래 19191010일에 개설됩니다. 1926년에는 300명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시설이 확충됩니다. 애초의 계획은 한국인 강습생을 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교회본부가 식민통치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국가권력에 인정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교파 신도로서 신도본국에 강제로 예속되어 있었던 천리교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항일의식에 눈뜬 한국인 신자들의 반발로 본래 취지와는 달리 초기에는 한국인 강습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한 국가의 특정 이익에 종속되는 종교가 아니라 인류 보편 종교로서 천리교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고뇌와 논의와 주장이 젊은 신앙인을 중심으로 펼쳐져 갔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라 카스오(郞幽生), 고설선집으로 유명한 마스노 코세쯔(增野鼓雪, 마스노 도오코오 增野道興), 1926년부터 조선교의강습소 주임이 된 마키노, 한국인 신자 김상봉(金翔鳳), 최정현(崔禎鉉) 따위입니다. 그 당시 이들의 발언들과 활약상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들 천리교 신자는 세계 모두가 신의 피조물이며 형제 동포임을 믿고 있다. 이러한 동포주의의 원리에서 보면, 그곳에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구별이 있을 수가 없다. (중략) 이렇게 보면 일본인만이 뛰어나고 조선인은 하등 인간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일어날 수 없다. 물론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느낌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하여 으스대는 꼴이 우리에게는 심히 불쾌하기 짝이 없다. (朗幽生, ‘동포주의의 철저’, 미치노토모 330, 1919.5, 63)

 

일본이 한국에 철저하게 심고 싶은 식민 정책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일본은 우월하고, 한국은 열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천리교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앞세워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 천리교단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청년 지식인의 리더격인 마스노 코세쯔는 본부원이 되고, 시키시마 대교회장도 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부원이나 대교회장에 연연하지 않는 사상가였습니다. 1920년에는 천리교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취임 당시 한 기에 150~200명이던 별과생이 크게 증가하여 교조 40년제 직전에는 6,000명까지 늘어나는 경이로운 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그 졸업생들이 너도나도 포교 일선에 나서 40년제 교세 배가 운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스노가 1925년에 미치노토모 발행책임자가 된 후 미치노토모를 통한 천리교 가르침의 보편성과 세계성에 관한 주장들이 청년 지식인들 중심으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이때 등장한 김상봉의 다음 발언은 그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생각건대, 신님은 세계 모두가 자식이라고 한 이상, 자식이 사는 곳은 모두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자식들인 형제가 사는 곳을 우열로 가르는 것은 바르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적 이상 세계의 중심은 일본도 좋고 조선도 좋다. 중국도 좋고 서양도 좋다. 형제의 나라인 이상 어디든지 동일함으로 선후를 따지고 근원을 따지지 않고 포교할 수 있어야 한다. (‘조선과 천리교’, 미치노토모 437, 1926. 10, 44)

 

이러한 주장은 천리교 발상지가 일본이라 하여 일본은 뿌리고 외국은 가지라고 하는 일본 중심의 전통적인 교리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정현도 신앙상의 선후를 따져 위아래를 나누는 것은 세계종교로서 천리교 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합니다. (니오이카케 6, 1923. 6, 2)

1926년 천리교 조선교의강습소 주임으로 부임한 마키노는 이러한 시대정신과 비판 흐름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일본어로 발간하던 강습소 기관지인 니오이카케를 한국어로 발간하고, 강습소 내 강의도 한국어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일본 정부의 식민지 언어정책에 비하면 아주 놀라운 발상이었습니다. 비판적 자세를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 정책의 주요 골자 중의 하나는 조선어를 말살하고 일본어를 공용어로 삼아 조선인을 일본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일본인화시키되 철저히 차별하는 것이지요. 절대로 동등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어 기관지를 내고, 한국어로 강의하도록 기본 방침을 정한다는 것은 여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식민지 지배에 동조하는 교회본부에 대한 한국인 신자들의 반발 심리를 충분히 알고 있다는 뜻이고, 그것에 크게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천리교에 대한 한국인 신자들의 신뢰도를 높였고,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한국인 강습생이 차츰차츰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결코 외부의 압력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 의지에서 발현된 결과입니다.

한편 교회본부에서는 1925년 천리외국어학교를 설치하면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어과를 설치합니다. 조선어과 설치에 대해서 처음에는 일본 문부성이 난색을 표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반 학교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어 습득을 의무적으로 행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조선어과를 설치한다니까 반대를 했던 것이지요. 진주 나카야마 쇼젱(中山正善)이 문부성에 잘 설득하여 조선어과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후 1945년 패전까지 15년간 전쟁으로 돌입합니다. 1932년 상하이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193991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1941128일에는 일본제국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합니다. 이른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의 시작입니다. 그때부터 일본과 한국은 완전히 전쟁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민중들의 고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특히 피지배자인 한국인들의 고충은 극심했습니다.

1932년부터 일본군의 직접 관여와 주도 아래 여성을 성노예화하고 착취한 위안부가 있습니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나 회유, 혹은 강제로 여성들을 전장으로 몰아갔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에 돌입하자 일본인들의 군입대가 늘어났고, 일본 국내에서는 노동자가 모자라자 탄광, 토목 현장에 조선인을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1938년 전시통제법인 국가총동원령이라는 강제 동원령이 발표됩니다. 일본사람들이 전쟁에 동원되니까 빈자리가 생기고, 그 빈자리에 1939년부터 한국인을 강제로 몰아갔습니다. 한 지역에 2~300명씩 한국인을 차출하여 부산, 시모노세키를 거쳐 각 작업장으로 강제로 이송해 갔습니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외로움과 배고픔, 가혹한 구타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사고로 죽는 사람보다는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나라 잃고, 정든 고향과 사람들과 등지고, 멀리멀리 이국땅에서 멸시를 당했던 노역자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강제로 연행된 많은 위안부와 노역자들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외로이 이국땅에서 죽어갔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과목을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19402월부터 창씨개명하여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게 합니다. 조선의 대학생들은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전쟁터로 몰아갑니다. 전쟁 수행을 위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강탈한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1936115일부터 심전개발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인의 혼을 변질시키고, 한국 땅을 그들의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 갔습니다. 19404월에는 종교단체법을 시행하면서 종교 포교 활동도 위축시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은 악랄한 제국주의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내선일체를 강조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황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합니다. 황민화 정책은 천황을 신으로 삼아 그를 정점으로 모든 민중을 그 백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천황제는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체계입니다. 그러므로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이 임명한 지배 권력자들도 역시 절대 권력과 권위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거역하거나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아무리 악한 짓을 해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거역하면 죽음이고, 죽임을 당해도 항의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자 신이 그 대변자를 통해 한 일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신은 무결점으로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천황제는 곧 위를 모두 신으로 받들게 하는 사상입니다. 위를 뜻하는 상()과 신()의 일본어 발음이 같은 카미(かみ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뇌되고 나면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동아시아 각 나라에 전쟁과 약탈을 서슴없이 자행해도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천황에게 그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천황제 황민화가 무서운 것입니다.

이렇게 휘몰아치는 광풍의 시대에는 그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든 견뎌내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가리지 않고 모든 활동이 일본군의 전쟁 수행이라는 거대한 목표 하나에 맞춰져 버렸습니다. 천리교도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포교사들이 전장으로 내몰리고, 교회본부를 이끌어가는 핵심책임자들도 외부적으로는 국가권력에 협력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1934년부터 시작된 만주 천리부락 건설에 참여하면서 전쟁에 협조하였고, 심전개발운동에도 직간접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국가 입맛에 맞는 활동을 많이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교조님의 가르침을 심하게 왜곡한 교의서, 1940116일 발간한 신도천리교교전연의(神道天理敎敎典演義- 일명 소화교전(昭和敎典)이라 함. 반면에 1903년에 만들어진 교전을 명치교전이라고 함)를 발간한 것도 그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국가권력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적극 통제 관리를 하면서 조직이 해체되는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습니다.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오늘이 있습니다,

 

1920년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젊은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 모처럼 활발하게 펼쳐지던 천리교의 보편주의 세계종교 운동도 이러한 광풍에 휘말리며 끝내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때 뿌려진 천리교의 보편주의 세계종교 운동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일제와 일본인 천리교인들이 모두 한국에서 물러간 이후에도 한국인 스스로 자신의 힘만으로 천리교를 일구어내는 위대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광풍의 여파는 지금도 여전히 은밀한 영향을 미치며, 천리교의 교세를 위축시키고 활력을 잃게 하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직시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 이 시순에 이 길을 신앙하는 우리들의 시대적 사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