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6호
입교187년(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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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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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64

 

천리교 가르침의 뿌리, 으뜸인 리 4

 

 

이 시 중

복원의 중심은 으뜸인 리

 

18381026일부터 이 길이 시작하였다고는 하나 처음 20여 년 동안에는 이 길의 가르침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 비방, 조롱을 받았을 뿐 누구도 귀 기울여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1854년에 이르러서야 순산허락을 계기로 이 길에 밝은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를 낳는 일은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교조님한테 순산허락을 받은 산모는 몸이 건강하고, 아이도 수월하게 낳았을 뿐 아니라 산후조리에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조님께 순산신님이라는 별칭이 붙으면서 교조님의 명성이 널리 번져갔습니다. 순산허락을 신호탄으로 만가지 구제 활동이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신자가 바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입교로부터 24년째인 1861년쯤에서야 비로소 신자라 할 만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교조님께 가면 아이 낳는 일도 수월하고, 여러 가지 질병이나 고민들이 해소가 되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변사람들 특히 신직자, 승려, 수도자, 의사, 동네사람들로부터 시기, 질투, 부당한 요구나 방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가는 손님들이 적어지고, 동네사람들은 귀찮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866년경부터 관헌이 경계의 눈을 가지고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868년 도쿠가와 막부정권이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정권 초기 몇 년간은 별 다른 억압이나 탄압은 없었습니다.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신정부의 유화정책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도국교화를 기본 정책을 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관헌의 간섭과 박해는 이미 예고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1874년 오야마토신사 사건을 빌미로 당국의 탄압과 억압이 시작되었습니다. 급기야 18741225일 나라중교원을 통해 신앙중지명령이 내려졌고 집터에 드나드는 사람까지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여드는 사람들을 끝내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 길을 없애려 해도,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참배 오는 사람들을 도저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1875년부터 교조님 연세 89세 되던 1886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관헌의 박해와 탄압이 극심했고, 그 탄압도 직접 교조님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연만하신 교조님은 이 동안 약 18차례나 유치 투옥되면서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18865월에는 신도관장 대리 후루가와 도요미찌가 집터로 찾아와서 교조님의 측근들에게 5가지 조항을 담은 서류를 제출하고 강제로 각서를 쓰게 했습니다. 각서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 奉敎主神은 신도 교규에 따를 것.

- 창세이야기는 기기(記紀) 2()에 따를 것.

- 사람은 만물의 영장류이므로 물고기의 혼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

신앙중지명령에서 조금 완화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말할 수 없게 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포교활동을 금지시키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신도의 근원은 고사기(古事記, 712), 일본서기(日本書紀, 680-720년 완성)입니다. 이것을 통칭 기기(記紀)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일본국가창세설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에 따르라는 것은 곧 천리교 독자적인 가르침인 으뜸인 리를 설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조님 살아생전부터 으뜸인 리는 세상 표면에 대놓고 가르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 20여년은 들을 사람이 없어서 가르치지 못했고, 만년에는 관헌의 간섭, 억압 때문에 숨어서 비밀스럽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교조님 은신 후 교조 1년제를 거행하는 중에 경찰의 방해 공격이 있어서 강압적으로 제전이 중지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태를 겪으면서 신앙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교회 공인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1888410일에 신도직할 천리교회 인가를 받게 되어 비로소 공식적으로 포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악가가 발간되고, 별석제도가 생겨나고, 친필과 고오끼 이야기, 지도말씀에서 가르침을 구하고, 근행과 수훈을 통해 전국적으로 교세도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약적인 성장은 국가신도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 당국을 당혹하게 하였고, 급기야 1896년 내무성훈령 제12(비밀훈령)를 만들어 천리교 말살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이때부터 신악가 1절을 부를 수가 없었고, 신악근행에서는 신악탈을 쓸 수도 없었으며, 남자만으로 근행을 올리게 됩니다. 여자악기도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되는 수난을 당합니다.

 

일파독립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청원 운동을 하는 가운데 정부의 억압과 강요에 의해 1903년에 교전(명치교전)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으뜸인 리가 아예 빠져있고, 신명도 교조님 가르침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런 교전을 기준으로 1908년 천리교는 일파독립의 인가를 받게 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런 교전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가를 받은 탓에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비교적 방해와 억압을 적게 받는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국의 단속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차츰차츰 조석근행을 복원하고, 지도말씀 친필을 공식적으로 발간하게 되고, 신악근행에 신악탈을 쓰기 시작했으며, 근행의 악기도 본래대로 되돌리게 되었고, 으뜸인 리도 대대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교세배가운동이 획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쇼와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가혹한 사상통제를 대대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다시 태초이야기 으뜸인 리는 표면에 말할 수 없게 되었고, 별석도 중단 되었습니다. 근행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며, 친필, 지도말씀도 표면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신악가는 팔수, 3, 5장이 삭제됩니다. 교세도 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 19458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 전 국민들이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2대 진주님은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하면서 추호의 망설임 없이 교조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고 복원을 제창하였습니다. 복원의 중심에는 으뜸인 리를 바탕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시면서 교전 편찬 작업을 서두르셨습니다. 차츰차츰 근행을 복원하고, 친필, 지도말씀을 다시 표면에 내었습니다. 그리고 1949(쇼와24) 1026일에 새로운 교전을 확정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교전에는 그동안 빠져있던 으뜸인 리가 표면에 당당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긴 세월 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으뜸인 리가 비로소 중심교리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교전을 만드는 편찬회의가 백 수십 차례 열리는 동안 2대 진주님은 빠짐없이 출석하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고, 오랫동안 이 날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셨던 모습이 엿보입니다. 교조님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할 때 언제나 으뜸인 리가 중심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으뜸인 리는 세계구제를 위한 아주 중요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며, 가장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구제를 바라시는 교조님께서 남겨주신 근본 가르침이기 때문이며, 그 당시 세계를 전쟁 속으로 몰아간 군국주의자들이 사상 통제를 하며 막으려 한 이야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으뜸인 리에는 어떠한 차별사상이나 전쟁의 논리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