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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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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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8

 

인연풀이

 

공상용(전 구만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포교를 나와 삼천포에 사는 처수를 제일 먼저 이길로 인도했다. 고성교회에 처음 데리고 오는 날, 고성교회 월차제 날이었다.

그 당시 처수 나이가 40대였다. 초대회장님은 신상개유 등을 개인적으로 방에 앉아 늘 봐주셨는데, 그날따라 월차제를 마치고 나서 신전감화를 하시면서 몸이 어떻게 생긴 사람은 어떻다는 것을 다 같이 봐라.”하면서 하필 처음으로 데리고 간 우리 처수를 일어나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고성교회 월차제에는 안 믿겨지겠지만, 사람들이 많을 때는 7, 8백 명이 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처수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초대회장님께서 여러분 다 저쪽을 한 번 보소. 저렇게 생긴 사람은 5분 아니, 3분도 못 누워 있습니다. 옆으로도 못 눕고, 옆으로 누워 있으면 팔이 저려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입니다.”하셨다.

그러니까 처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이 보면 꼭 짠 것처럼

맞습니다. 지금도 팔이 저립니다.” 했다.

모로 누워서 5분을 못 누워 있는데, 그것이 혈압 때문이라 했다. 즉 혈압이 잘 오르는 타입이며, 나중에는 중풍에 고생을 할 거라 하셨다.

월차제가 끝난 뒤, 점심을 들면서 처수가 집사람에게

아이고, 공서방도 저분(회장님)처럼 저렇게 잘 아나?”

천리교 선생이 그런 거 몰라서 선생이라고 하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천리교 가자고 한 거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 처수는 지금까지 신앙하고 있다. 그때 초대회장님이 그렇게 속속들이 말을 안 해 주었으면 그 처수는 천리교를 못 다녔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고비를 많이 넘겼는데, 지금도 천리교에 간다고 처남이 팬다고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대난을 소난으로 소난은 무난으로 하는 용한 재주가 초대회장님에게 남달리 있었다.

그리고 초대회장님은 늘 입버릇처럼 신자들에게 아들이든 딸이든 결혼을 시키기 전에 한번쯤은 나에게 꼭 물어보고 하라고 당부하셨다.

초대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끝을 맞춰보면 꼭 맞는 그림 퍼즐 같았다. 말씀하신 그 일이 크든 작든 다 일어났다.

구만교회 신자 중에 ㅇㅇ이라는 신자가 있었다. 이 신자에게는 딸 순님’(가명)이가 있었는데, 저희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처녀 때부터 신앙을 했었다.

하루는 초대회장님이 순님이를 찬찬히 보면서 ㅇㅇ댁한테 이 아이는 내가 시집가라고 할 때 시집을 보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시집을 일찍 보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ㅇㅇ댁 남편이 하루는 읍내 나갔다 들어와서는 오늘 누가 어디에 괜찮은 남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쪽으로 순님이를 시집을 보내면 어떻겠냐고 했다.

ㅇㅇ댁은 초대회장님한테 들은 것도 있고 해서, 물론 자기 남편이 자기 말을 듣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가 우겨도 보고 딸이 안 하겠다고도 해보았지만, 나중에는 천리교를 못 가게 하는 데는 어쩔 도리 없이 두 팔을 들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말하는 곳으로 딸을 시집보냈다. 그런데 결국은 오래 못 살고 헤어졌다. 그렇게 좋다고 하던 곳인데도, 신랑에게 맞아 결국은 못 살고 헤어졌던 것이다. 두들겨 패는데 맞고는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해서 도망을 나와 강습소를 들어갔다. 강습소를 마치고 집에 있는 순님이에게 아버지는 이번에는 재일교포가 좋다며 가라고 해서 자기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남자와 결국에는 재혼을 했다.

초대회장님 말씀대로 했다면 그 액운을 조금은 피해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본다.

단노와 양철

 

고성교회 초대사모님 별명은 양철이다.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다 못해 댕댕거리기까지 한다고 해서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왜 양철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초대사모님은 천리교를 잘 몰랐다. 지아비가 일본에 가서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설마하니 천신님에 미쳐 하루가 멀다하고 집안 가득 아픈 사람만 데리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가 초대회장님은 근행만 보지 그 환자들의 병시중은 온통 자기 몫이다 보니 그 스트레스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느 아낙네처럼 바가지 수준이다가 나중에는 바가지가 양철이 된 것이다. 원래 초대사모님 성품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초대사모님 이야기라면 초대회장님은 꼼짝을 못하셨다. 같이 살면서 이생에서 다 갚겠다는 심산으로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다.

어느 땐가 밥상을 앞에 두고서 초대사모님이 한참동안 잔소리를 하자 아이구 더워라, 오늘따라 방안이 와 이리 덥노하면서 밥상을 들고 마루로 나가셨다.

그러면 초대사모님께서도 마루로 따라 나가 또 잔소리를 해댔다. 초대회장님이 다시 밥상을 마당으로 가지고 나가면, 마당에까지 따라가 잔소리를 하셨다. 그러나 초대회장님은 , 와 이라노?’ 라는 말씀 한 번 없이 단노로써 평생을 지내셨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만은 초대사모님도 인자하셨다. 모든 신자들이 가서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언제나 그래 그래하셨지 안 된다는 말을 하신 적은 들어본 적이 없다. 초대회장님과 함께 만인의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

 

안 좋은 것 바꾸는데...

 

포교 20여 년간(1953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회장님 혼자서 지금의 고성교회를 다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루가 다르게 눈부신 발전을 했다.

그 까닭을 내가 본 견해로는, 누구처럼 초대회장님이 전도를 많이 해서 신자를 모으신 것은 아니다. 어디에 가든지 냉수목욕을 하루에 세 번씩-아침, 저녁, -하고, 근행과 기원 드리는 것을 빠트리지 않았으며, 상급교회장님이 무조건 시키면 무엇이든 첫마디에 , 하는 성진실, 그것만을 평생을 두고서 실천한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남의 일을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이미 다 지나간 과거를, 그 중에서도 안 좋은 것만을 다 이야기 해주니까, 찾아오는 사람마다 맞습니더, 맞십니더, 맞십니더하며 진심으로 그를 따르고, 경외심을 가진 데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천리교 교리말씀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천리교 교리만을 본다면, 지금의 젊은 선생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옛날처럼 일본(터전)을 가기 힘들지 않아, 젊은 사람이 많이 배워오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교리를 잘 안다 하더라도 막상 들어보면, 그 당시 선생들에 비하면 장님 코끼리 말하듯 하는 것 같아서 당최 귀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초대회장님은 오로지 천리교가 이렇니 저렇니 말씀하시지 않고, 팔자 고치고 싶나. 안 좋은 운명, 안 좋은 인연, 나쁜 악인연 그거 다 바꾸는 데가 여기다. 마음껏 해봐라. 다른 데서는 바꿀 데가 없다. 잠시 동안 나빠진 인연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데가 여기 천리교다.’라는 이야기만 하셨다. 그러니 신자들이 부족 쌓을 것도 없으니 그것이 참 교리였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정말 힘든 줄도 모르고 초대회장님 말씀을 신님 말씀쯤으로 알고 다들 열심히 신앙을 했다. 요새 신앙이야 그때 비하면 새발의 피정도라고나 할까. 흉내도 내기 힘든 신앙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수호가 잘 나지 않는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리와 실천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시에 움직여야 되는 것이지 과분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계속)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