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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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8

 

한줄기 마음만이 필요해

 

김일련(지선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1957, 마산시 상남동에서 포교를 하고 있던 박귀임 선생한테서 신앙을 시작했다. 그 당시 초대회장님께서 포교소에 순교를 오시면, 상대방이 좋다하면, 인연 판단을 잘 해주셨다.

어느 날인가 나를 보시더니 이 길을 걸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이 길을 걷지 않으면 가정파탄이 온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이 길을 걸어야 된다는 소리에 회장님도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가정파탄이 도대체 무슨 말이고.’하며 부족이 나왔다.

초대회장님의 인연 판단은 참으로 용했다. 그것이 틀림이 없는데도, 워낙 신앙이 짧았던 나는 그 말을 예사로 들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남편이 서울에 취직이 되어서 서울로 먼저 가고, 나는 2년 후에 따라 갔다. 그렇게 8년을 서울에서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 초대회장님은 서울 신당동에 있는 교단에 한 달에 한 번은 꼭 오셨다.

그 말을 듣고도 포교는 하지 않고 초대회장님이 서울에 오시면 초대회장님을 만나러 그곳에 가는 것으로 신앙의 갈증을 풀고 있었다.

그렇게 갈 때마다 초대회장님께서는 이 길을 걸으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이 흘렀는데, 정말로 8년 후에 초대회장님이 우려한 대로 되어 버렸다.

이 길을 걷지 않으면 가정 파탄이 오고, 이 길을 걸어야 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도 평신앙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고, 평신앙만으로 8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실 그때 나는 글을 잘 몰랐기 때문에 포교를 할 자신이 없었다. 또 평신앙만 하고 덕만 쌓으면 되지 주위에서 하는 포교를 보고 지레 겁을 집어 먹었던 나는 내가 저것을 어떻게 하겠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포교를 하려면 글도 좀 알고 유식해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포교를 하겠나 싶어 초대회장님에게 여러 번 속내를 이야기했다.

글을 몰라도 되고, 오직 이 길은 한줄기 마음이 필요하지 지식이나 학문은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언젠가는 포교를 해라는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그 당시 서울에서 남편은 문공장을 차려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가까운 데 구로교회 산하의 포교소가 한 군데 있었다. 자연히 가까이 있으니까 그곳으로 조석 근행을 보러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신앙을 하면서도 초대회장님하고는 항상 연결을 하고 지냈다.

만날 때마다 초대회장님은 포교작정에 대한 설득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어버이마음에 내가 불쌍했던지 그냥 여기 서울에 내가 집을 하나 구해줄 테니까, 포교를 할래.”하며 다짐을 자꾸 받으려 애쓰셨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회장님, 아시다시피 아저씨(남편)가 아직 신앙이 안 되어 있습니더. 잠깐 마산에서 신앙을 했지만, 서울로 올라온 뒤로는 그마저 안하고 있습니더.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자기는 신앙을 하지 않지만, 신앙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에 반대를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신앙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더. 그래서 나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신님에게 은혜를 하면 되지. 포교까지 할 생각은.”

서울 생활 8년 동안에 남편은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 돈을 노름으로 다 날려 버렸다. 그래서 서울에서 강습을 보냈다.

남편이 강습을 받는 동안에 나는 나대로 신님에게 포교를 나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남편이 강습을 받은지 두 달만에 집에서 잠이 살짝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을 내 스스로가 느낄 수가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방안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데, 발끝에서 서서히 죽어 올라오면서 등에서는 착착착착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죽어갔다.

그것이 목에까지 올라오더니 내 숨을 막았다. 그래서 어버이신님, 내가 지금까지 회장님이 포교를 하라고 했는데도 포교를 안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봐주이소. 한 번만 살려주시면 어버이신님이 한 번만 봐주시면 내가 포교를 하겠습니다하고 죽어가면서 내 마음 속으로 작정을 했다.

서울에서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도 포교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포교작정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남들이 포교하는 것만큼이나 나름대로는 열심히 전도를 하러 다녔다.

하지만 가르침을 받고는 곧 바로 포교 작정을 하게 되었다. 목에서 조금만 더 올라오면 죽을 목숨인데, 마음작정을 하니까 올라오던 것이 금방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나서 한 30분이 지났을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금방 좋아졌다. 그렇게 나 혼자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일어나보니 내 눈이 멀어 있었다. 어버이신님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기 때문일까, 그것을 실천할 때까지 장애를 주셨다. 눈앞이 온통 뿌옇게만 보였다. 가까이 가야 사물이 보였다.

그런 눈으로 몸이 좋지 않은 세 살짜리 아이를 업고 매일같이 전도를 나갔다. 김포에서 구로동까지 걸어가면 40리가 넘는 길을 매일같이 걸어 다녔다. 여러 가지 마디가 나왔지만, 신님하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업고 전도·포교를 20일을 하고 나니까 비로소 눈앞이 보였다.

포교작정이 너무 늦었던 것일까. 남편은 강습을 마칠 때쯤 되어서 다른 여자와 사라져 버렸다. 남편을 찾겠다고 포교 작정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전도를 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 몇 달이 지난 뒤, 시댁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남편은 아이들을 자기에게 다 주고 이혼을 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를 데리고 시댁에서 살고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신님의 이치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나에게 포교를 나가라는 신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다 넘겨주고는 인천으로 단독포교를 나갔다. 인천에서 6개월간 포교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초대회장님은 매월 15일만 되면 서울에 올라오셨다. 초대회장님을 만나러 신당동에 갔다.

회장님, 포교를 나갔습니더.”

!” 하시면서 깜짝 놀라셨다.

니가 고성으로 와서 조금이라도 배워 포교를 나가야지 니 혼자서 무슨 포교를 하노.”

아이구, 그렇습니꺼?”

빨리 고성교회로 내려 온나.”

? 여기서 포교를 하면서 회장님을 받들면 안 됩니꺼.”

더 말할 것 없이 어서 고성교회로 내려 온나.”

는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초대회장님께서는 나에게 고성교회에 들어와서 3년을 배운 뒤에 포교를 나가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포교만 하면 되지 배울 것이 뭐가 있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이었다. 내가 덕이 없으니까 고성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덕을 쌓아서 포교를 나가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내가 고성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갔을 때가 구()신전이 지어진지 4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 많던 신자들이 교회역사로 인해 많이 떨어져 나갔는데, 니가 전도를 해서 이 신전에 신자들을 다 채워놓으라하셨다.

결국에는 초대회장님 말씀대로 고성교회에 들어가서 1년간을 전도사 생활을 하고 나니까 초대회장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니는 명이 없기 때문에 고성에서 3년을 매일같이 고성 읍내를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밥도 앉아서 먹지 말고, 부엌에 들면서 나면서 서서 밥을 먹어라.”고 하셨다.

초대회장님 말씀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신전 청소를 하고 근행을 보고나서, 사택 청소를 깨끗하게 해 놓고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밥 한 숟가락 먹고 전도를 다녔다. 내가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면 그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대회장님은 인연개유를 해주셨다.

그리고 항상 인연개유를 하는 옆에서 듣고 배워라고 하셨다. ‘얼굴색이 저렇게 노란 사람은 인간 고민이 많고, 또 코가 들창코로 생긴 사람은 돈을 아무리 벌어도 다 나가버린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듣고 보고 한 것이 막상 내가 포교를 나갔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고성교회에서 생활을 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초대회장님이 나에게 고방 열쇠를 주셨다. 그 열쇠로 각 고방들의 문을 여는데, 각 고방마다 곡식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꿈을 깨고 나서 깨달은 것이 만약에 초대회장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마음대로 인천에서 계속 포교를 했다면 명이 없는 내가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데, 초대회장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나에게 덕을 쌓으라고 나를 고성교회로 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4년째 될 때였다. 다시 꿈을 꾸었다. 초대회장님이 순교를 나가시고 안 계시는데, 신전에서 신님이 나에게 빨간 옷을 주셨다. 그래서 이제는 포교를 나가도 된다는 뜻이구나 싶어 다시 서울로 포교를 나가려고 초대회장님 앞으로 갔다.

초대회장님은 나에게 마산으로 포교를 나가라 하셨다. “니는 마산에서 포교를 하면서 고성에 자주 와서 전도를 많이 해줘야 되기 때문에 멀리 가지 마라,”고 했다.

마산이 친정이고 시가도 있어서 마산에서 포교를 하기 싫다고 해도 자꾸 마산에서 포교를 하라고 시키셨다. 그래도 내 고집대로 서울로 가서 8개월을 포교를 하다가 결국은 마산으로 내려왔다. 결국에는 초대회장님 말씀대로 다 된 것이다.

내가 마산에 내려와서 2년째 되던 해, 초대회장님께서 출직을 하셨다. 만일 초대회장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포교를 하려고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초대회장님에게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지금도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 작년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