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그리운 초대회장님 13

 

자비와 근면이 생활신조인 듯

향기19724월호에서

체중 80킬로그램의 육중한 체구에서 풍기는 자비심은 아직도 누구를 상대하여 가슴 아플 정도로 상대에게 말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측근의 이야기다.

그만큼 넓은 마음의 소유자이기에 그에게는 많은 사람을 키워나갈 힘이 생기는가 보다. 62세의 연령에 비해 놀랄만한 정력으로 전국 곳곳의 순교를 나가고 있었다.

근면한 성격은 혹 교회에 계실 때도 잠시를 쉬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일하며 일할 때는 온 정성을 기울이는 그 모습은 참으로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더욱이 교회장에게는 남이 쉬이 따르기 힘든 포교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포교 특징

 

교회장님은 신님의 용재로서 포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술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담배

도 정 피우고 싶으면 꽁초를 주워 피웠다 한다.

그리고 상급교회의 월차제에는 한 번도 빠져 본 일이 없는데 한번은 큰 비가 내려 교통이 불편하여 참배를 안 했더니 마디가 생겨 크게 가르침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고 한다.

그리고 아직 상급교회장 앞에서는 한 번도 큰 목소리로 대답 한 번 아니하고 더구나 옳고 그름의 시비를 그 앞에서 가려본 일이 없다고 한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되는 철칙으로 알고 계시는 듯했다. 그리고 측근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까지도 하루 저녁에 냉수욕을 적게 하는 때가 두 번으로 몸을 씻고 근행 보는 일만은 철저하신 모양이다. 그러나 흔히들 하는 단식은 한 끼도 해보신 적이 없다는 것이 또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가장 기뻤던 일과 가장 괴로웠던 일

예나 이제나 기쁜 일이라면 신자들이 어버이신님의 수호로 도움을 받는 일이며, 또 도와진 후에 감사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기원을 해 올 때에 언제나 기뻤다 한다. 그것을 낙으로 포교생활에 충실할 수가 있었다 한다.

괴로웠던 일은 수년 전에 상급교회의 비위를 잘못 맞추어 큰 꾸지람을 들어 마음이 흔들릴 때였다고 한다.

잔뜩 부족을 사고 돌아와 교회에 들어서서 신전에 엎드려 절을 하려고 하는데, 난로 뚜껑이 하고 올랐다가 떨어지는 듯한 큰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실제로는 뚜껑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고 정신 차리라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인 것을 깨닫고, 그 뒤 상급교회장을 다시 찾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자 상급 교회장도 따라 울었다 한다.

 

금후의 포부

 

장래의 포부를 묻는 기자에게 교회장님은 장래의 포부라기보다 포교 이후 항상 지녀오는 염원이 있다. 어떻게 하면 용재를 많이 양성하여 어버이신님의 고마운 진리를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알려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 순회강습을 여는 목적도 알찬 어버이신님의 일꾼들을 뽑아내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본부처럼 청소년회를 조직하여 많은 청소년들을 어릴 때부터 신앙심을 길러주는데 힘써 볼 결심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교단에 바라는 일은 모든 교단의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좀 더 분발해서 후배에게 더 좋은 본길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성교회는 교회장님의 자비와 근면을 주축으로 항상 발전할 것이며 더욱이 이번 강습생 중 40여명의 용재 작정자가 구제일선에 활약하는 그 날이 오면 고성교회의 교세는 파죽지세로 번창해 갈 것이다.

 

첫 참배

김위태(칠암교회장)구술

남상우 기록

 

초대회장님을 처음 뵌 것은 19528, 내가 사천 농업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여름방학 때였다.

천리교의 천()자도 몰랐던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몇몇 사람과 함께 진주서 기차를 타고 마산으로 향했다. 당시 초대회장님께서는 마산에서 신님을 모시고 포교활동을 하고 계셨다.

신자라고 해본들 충무 초대교회장과 원남성 초대교회장의 고향인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에 사는 우리집의 사촌 형님들이 전부였을 때다.

같이 간 일행 중에서는 나만 처음 참배를 하는 터라 남들은 끊어 앉아 박수를 쳐가며 참배하는데, 나 혼자만 주뼛주뼛 거리며 서있었다. 그런 나를 언제 보셨는지, 초대회장님께서는 내 옆에 다가와서는 참배하는 법을 인자하고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신전 가운데 있는 것을 천신님전이라 하는데, 천신님 수호로 인간이 창조되어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기원드리고, 만일 일가친척 중 신상·사정자가 있으면 완쾌되도록 기원드려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이 우측에 있는 것이 교조님전인데, 우리들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신 고마우신 분인 교조님께 감사기원드리고, 신님전과 똑같이 교조님전에서도 일가친척 중에 신상·사정자가 있으면 완쾌되도록 기원드려라.”고 하셨다.

그리고 저쪽으로 보이는 것이 조령님전인데, 출직하신 선배선생님이나 조상님들의 혼을 모시는데, 그들의 혼을 맑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이 세상에 다시 환생할 때 건강한 몸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일러주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초대회장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전 참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물론 조령님전에 엎드려 기원을 드릴 때는 그때보다는 한참을 더 엎드리고 있다.

초대회장님의 혼을 맑게 하여 주시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때는 더욱 건강한 몸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원드리기 때문이다.

 

땅부자

 

어느 여름날 초대회장님께서 사천포교소에 순교를 오셨다.

월차제를 마치고 조금의 여유가 있었던지 월차제 참배를 왔던 나를 앞세워, 지금의 사천초등학교 뒤에 있는 사천산성에 산책을 가자고 하셨다.

산성의 끝자락에서 사천 시내를 굽어보면서 사천중학교 쪽을 가리키면서 마을은 말이야, 항상 동쪽을 향하여 먼저 발전하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을 뜻하는지를 잘 몰라 그냥 흘리고 말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손뼉이 절로 쳐진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만 두고 생각해 보아도 서울의 동쪽 방향은 서울에서도 가장 먼저 발전했다.

강동(江東)1970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강남(江南)과 함께 엄청난 부동산 바람을 몰고 오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내가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땅값이 너무 오른 뒤였다. 그리고 직장과도 너무 멀어 이사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에 그때 하신 초대회장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다 마음에 새겨 두었더라면 이미 나는 땅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장수하는 법

 

초대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 당시 배움도 있었던 내가 왜 꼼꼼하게 적어 두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해본 적이 가끔 있다. 그래서 지금은 고성교회 월차제 날이면 누구의 말이 되었든 메모해 두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초대회장님께서 출직하신지 이미 20여 년이 넘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초대회장님 말씀 한 구절이 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는 양기(陽氣)가 발과 다리 부근에 많이 머물다가 사람이 차츰 자라면서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출직할 즈음이 되면 코 부근에 조금의 양기가 남아 있다가 그마저 없어지면 출직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제일 먼저 늙는 몸의 부분은 양기가 가장 먼저 지나간 다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건강하게 살려면 어디보다도 다리가 건강해야 한다고 하셨다.

최근에야 예방의학에서 걷기와 달리기가 건강에 좋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초대회장님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다리가 튼튼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상자에게 노방전도만큼 좋은 약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래도 노방전도를 하려면 걸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회복된다는 거였다.

초대회장님께서 왜 그토록 우리들에게, 특히 신상자들에게 전도 나갈 것을, 그것도 안 되면 히노끼싱이라도 하라고 강조하셨는지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이 말씀을 거울삼아 지금도 노방전도를 계속하고 있다. 누구를 구제하겠다는 욕심(?)도 있겠지만, 전도를 한 날은 내 스스로가 풍()을 맞은 왼쪽 다리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삶을 기대하는 분이 계신다면 한 손에는 전도지를 들고서 입으로는 천리교를 믿으세요.’라며 걸어보자.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도.

 

 

그분은...

 

김승규(밀양 초대교회장) 구술

 

현재 진해시에 소재하는 경남교의강습소는 원래 천리교연합회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1959618일에 착공하여 19591018일 완공한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때는 건축시공이 지금하고는 사뭇 달랐다. 지금 시멘트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때는 벽만 조금 시멘트로 바르는 흉내를 내었지, 그 외는 목재를 가지고 건물을 다 짓다시피 했다.

그래서 공사비의 3분의 2가 목재값으로 다 쓰일 정도였다. 그 목재를 억척스럽게도 초대회장님이 다 대었다. 원남성 초대교회장의 전화 한 통화면 하룻밤 새도 몇 트럭이고 목재를 보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목재를 사기 위해 든 돈도 돈이겠지만, 그 많은 목재를 정확한 날짜에 어디서 그렇게 다 구해왔는지 원남성 초대교회장이 말한 그 날짜를 하루도 어긴 적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큰 자랑으로 여겨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닐만도 한데 일체 그런 일이 없으셨다. 언제나 우직하게 주어진 일을 아무 말 없이 하는 순직한 분이셨다.

그래도 고성교회가 너무 불같이 일어나는 게 궁금해 하루는 도대체 고성교회장이 어떻게 하기에 고성교회는...”하고 원남성 초대교회장에게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글쎄다. 내가 듣기로는 하루일과라 해본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근행 마치고, 그 날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체로 교회 내 히노끼싱 등으로 소일한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산하 선생들 중에 누가 찾아와 어디에 누가 중한 병에 걸려 다 죽어가는데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하면, 그를 앞세워 신상자를 찾아가 이 길의 가르침을 전하고서는 아침이고 밤이고 계속해서 기원근행을 드리는 것밖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렴풋이 알게는 되었지만, 교세가 불같이 일어난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야 알 수가 있었다. 그 분의 감화말씀을 통해서.

폐가 좋지 않아 젊어서부터 고생을 했는데, 우리보다 서양의학이 발달한 일본으로 가서 큰돈을 벌어 그 곳에서 병도 고치고 집안도 일으켜 세워야겠다며 홀어머니와 마누라를 두고서 밀항을 해, 일본에 가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소주를 빚는 일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자기자본으로 직접 소주공장을 가질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속에는 하루빨리 돈을 더 많이 벌어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버는 대로 금을 사들였습니다.

금을 얼마나 많이 사 모았는지, 싸둔 보따리의 네 귀를 묶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갑자기 신상이 찾아와 천리교를 알게 되었는데, 그 동안 모아두었던 금을 전부 남김없이 올리고부터 신기하게도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이 길의 가르침을 하루속히 한국에도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소주공장을 처분해 겡와분교회(원남성교회의 상급교회)에 아낌없이 이바지하고서 일본을 떠나 여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셨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대회장님은 본인 스스로 전도를 하러 다니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시간만 있으면 오히려 집안으로 들어가 근행에 충실했다고 전한다.

노방전도만이 교회성장의 지름길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던 나는 일순 망치로 뒤통수를 세차게 맞은 격이었다.

모든 인간의 악의 근원인 욕심을 버렸다는데서 교회성장의 해답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강한 교조모본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렸구나 하는 생각에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짓과 아첨이 없는 그야말로 교조님께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바보 같은 분이셨다.

상급교회장이신 원남성 초대교회장이 옆에 있든 없든 한결같았다. 나랏님이라 하더라도 곁에 계시지 않으면 입바른 소리를 하던 세상에 일체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 않으셨다.

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서 묵묵히 상급 이야기라면 따르셨다.

차림새도 언제나 수수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도 교세는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굉장한데도 신발 사이로 비적비적 나온 양말 하며 그야말로 영락없는 시골 농부 같은 차림이셨다.

누구든 살림이 펴지면 예전의 초췌한 자기 모습을 빨리 잊고 싶어서라도 생각이 달라질 법한데 초대회장님은 언제나 검소한 차림 그대로였다.

(다음호에 계속)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