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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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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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2

화를 안 내서 되는가 봐

 

박미자(연진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원남성 초대교회장이 한번은 나에게 고성회장은 화를 잘 안내서 되어오고, 나는 성을 잘 내어서 덕을 다 까먹기 때문에 잘 안 되는가 봐.”하셨다.

그래서 내가 와예?”하며 물었다.

오늘 말이다. 내가 고성교회 순교를 갔는데, 감화를 마치고서 방 안에 들어오니 가방 안에 넣어둔 돈이 없어졌어. 그래서 고성회장한테 교회 안 누군가가 가져갔을 거라고 얼른 조사해 보라고 했지.”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초대사모님이 잘난 것 배워 이제는 신자들까지 도둑놈으로 만든다.”며 마루에 올라앉지도 않고 걸터앉아 월차제 점심식사를 하시는 초대회장님 앞에서 온갖 입씨름을 다했다. 그런 초대사모님에게 초대회장님은 미안하다.”하시면서 밥상을 들더니 다른 데로 슬쩍 피하기만 하셨다.

그것을 옆에서 쳐다보던 내가 오히려 화가 복받쳐 원남성교회로 와서는 원남성 초대사모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초대회장님은 성을 안 내시고, 부지런하기로 이 길에서 귀감이 된 지 오래다. 전도는 우리만큼 집집마다 다니시지는 않으셨지만, 신자들을 데리고 밭에 나가서 하는 히노끼싱은 누구보다 앞장서 하셨다.

그리고 초대회장님은 누구에게나 마음이 푸근하셨다. 성격이 급하지 않으셨다. 또 근행에도 빠지지 않으셨다.

오직 근행뿐이야. 근행이 생명이야라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순교를 갔다 오시다가도 차가 늦으면, 근행을 못 보실까봐 교회에다 전화를 하셨다. ‘내가 몇 분 후에 교회에 도착할 거니까 내가 가도록 근행을 보지 말고 다들 기다리고 있어라고 할 만큼 근행을 중요시 하셨다.

근행을 안 빠지고 근행을 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저 멀리서 오시다가도 전화를 거시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중전화도 잘 없었던 때라 전화 걸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늦게 오시는 날은 공중전화만 보이면 지금 근행보러 간다고 기다리라는 전갈을 주시곤 했다.

이 길은 오직 근행뿐이다. 근행이 생명이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만,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예사로 들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에야 겨우 근행만은 진짜 진실히 보아야겠구나 하고 깨달아 본다.

원남성 초대교회장은 숨을 넣어 주고, 숨을 내어 주고, 숨을 통해 주고 먹으면 소화시켜 주시고, 11초도 안 쉬고 우리들을 도와주시는 그 은혜가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을 알아라.”는 말씀을 즐겨 하셨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천리교 교리가 아니고 자기가 지어내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진짜 교리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신이 눈에 어떻게 보이는 가 싶어서 귀를 쫑긋해서 들으면,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이 보여 주시는 것이지, 우리들이 보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이 길의 선배선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나, 우리들이 못 알아 듣고서 미련스럽게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초대회장님의 회고록을 계기로 내 스스로를 점검해 본다.

 

 

고성교회

향기 19724월호에서

대한천리교에서도 굴지의 교세를 자랑하는 고성교회의 웅자(雄姿)는 고성읍 서외동 162번지 1,100평의 높은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는 청기와의 172평의 백색 건물이다.

고성교회는 1972123일부터 제65기 순회강습을 열어 오는 422일 수료식을 갖는다. 고성교회는 10년 전 첫 번째 순회강습을 연 후에 이번이 두 번째인데 그간 횟수가 거듭되지 못한 것은 교단 전반의 침체적 분위기가 이 고성교회에도 미치게 된 소치라 할까.

이번 강습으로 교회의 분위기는 물론 그 산하 교회 · 포교소까지도 활발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128명의 학생이 수료하는 가운데는 40여 명의 용재 작정자도 있어 앞으로 교조님의 본길 따라 구제일선에 나아갈 실천을 쌓고 있다.

요즘은 422일 춘계대제를 앞두고 재작년 교회 건축 이후 완성되지 않은 데를 마무리하는 작업이 강습생들과 일반 신자들의 손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또한 환경정리와 수료식 준비 등으로 교회는 지금 한창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순회강습이 시작되던 지난 123일부터 1주일 교대로 강의를 맡기 위해 한 달이면 보름을 고성교회에서 생활하지만 교회장님과 조용히 마주 대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교회장님은 바쁜 몸이다.

이달은 대제 달이라 순교에 더욱 바쁘신 나날을 보내고 있는 탓으로 간밤에 오신 교회장님을 새벽 같이 졸라서 겨우 응접실에서 잠시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신상이 입신동기

교회장님께서 입신하신 것은 1952년 교회장님 나이 42세 때였다고 한다.(1952927일 교회본부 수양과 제135기 수료)

청운의 뜻을 품고 낯설은 일본땅에 왔으나, 미처 그 뜻을 펴지 못한 채 폐결핵, 위궤양, 피부병, 치질, 심한 노이로제 등 질병 제조공장이나 차린 것처럼 갖가지 병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래도 하늘은 무심치 않았던지 실의에 빠졌던 그의 앞에 천리교 포교사(원남성 초대교회장 최재한)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만 가지 의심뿐이어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으나 강습을 받으면서 2개월째부터는 차츰 도움이 나기 시작하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수호를 받는 것을 볼 때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수호를 받으려면 오직 히노끼싱을 많이 해야 된다고 깨달아 물질적·육체적 신의봉상을 힘껏 실천하여 그해 8월 도움을 받아 이내 고국으로 돌아와 신님의 일꾼으로 구제일선에 나오게 되었다.

 

마산에서 첫 포교

수양과 생활을 하면서 신님의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작정한 마음을 흔들지 않고 마산에서 포교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천리교가 번창하지도 못했고 몇 군데 있는 곳은 그 흔적도 나타나지 않을 때인지라 정말 외로운 포교의 길이었으니 그 때가 19532월이었다.

처음엔 외롭고 비위가 약해서 하루 두 집, 많으면 세 집을 전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사람 두사람 모여오는 사람마다 신기한 도움이 나게 되니 2개월 만에 4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제일 첫 신자가 지금의 충무교회장 김철암 선생이었다. 훌륭한 선생 밑에 훌륭한 제자가 나기 마련인가? 교성교회의 첫 신자인 김철암 선생의 말에 의하면 위궤양과 폐결핵으로 투병 5년 동안에 부유했던 시골살림을 탕진하고 죽음직전에 있을 때 고향인 사천면 우천리 최재한 원남성 초대교회장 형수의 전도로 어버이신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성교회장님이신 이영수 선생이 마산시 상남동에서 포교를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반신반의하며 찾아갔다. 병마의 고통에 못 이겨 한때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형편없었던 그였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행여나 하는 마음에 시골버스에 몸을 싣고서 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병세를 알 수 없었던 그는 가는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민등록증을 속옷에 넣고 11시간이나 고통을 겪으며 밤 8시가 되어서야 포교소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1953428일이다. 처음으로 찾게 된 천리교는 단칸방에 신전을 모시고 있었다. 솔표 석유상자를 보잘품없이 벽높이에 달아붙여 신전이라고 꾸며 놓고 있었다.

그런 신전이었지만, 그 앞에 엎드려도 신이 두려웠다. ‘저 안에 있는 신이 나병이었던 최선생과 폐병이었던 이선생을 도왔으니, 분명 내 병도 도와주겠지하는 경외심 때문이었을 것이다며 마산에서의 고성교회 초창기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현재(1972)의 교세

지금의 고성으로 옮겨온 것은 충무교회장이 수호를 받고부터이다.

김철암 선생이 입신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마산에까지 월차제 참배를 하면서, 교리서적과 교화말씀을 통하여 본인의 사고방식을 180도로 바꾸고 신상은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에 눈뜬 5개월 만에 수호를 받게 된다.

과거에 그토록 좋아했지만 병으로 인하여 못 마신지 3년 만에 농주 반잔으로 건강을 시험하고 통증이 없자, 너무나 기뻐 바로 지게를 지고서 일자리에 나갔다 한다. 그 사실을 안 동네사람들은 그날 바로 너도나도 30여 명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마산을 찾게 된다.

이때부터 고성교회는 번창하기 시작했다. 김철암 선생이 도움받은 것을 지켜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 멀다며 고성으로 이전되기를 간절히 기원드림과 동시에 이영수 선생에게 상의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된다.

19531022, 처음에 조그만 초가집에서 3년을 고생했다. 다음에는 33평 건물, 70평 건물로 점차 넓혀 오다가, 3년 전 현재의 870평의 큰 대지를 수호받아 교회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691010일 교회건축의 대역사를 시작했다.

건물은 신전이 172, 사택 56, 합숙소 53, 목욕탕 11, 창고 10, 변소가 8평으로 연건평 310평의 웅장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산하 교회만도 14개소이며 포교소는 100여 군데나 되는 대교세를 갖고 있으니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그 산하 교회 · 포교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이와 같은 큰 교세를 갖게 된 데는 고성교회장님 나름대로의 포교 특징과 본받을 만한 생활신조에서 신기한 구제의 실적에 의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