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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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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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0

그 날의 담판

하영선(명성포교소장) 구술

남상우 기록

고성교회장님, 며칠 전 오후입니다.

이회장.”

.”

사월 한 달 요양이 끝나면 전국 순교를 같이 떠나자. 인근 통영은 물론 서부경 남일원, 배둔을 시작으로 마산·부산지구, 왜관·구미지구, 대전·청주·조치원·천안지구, 경기도·서울지구와 강원도 등지를 돌자.”고 하시면서 금방 건강을 회복할 것처럼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이 제자는 얼마나 마음이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중략)이 땅의 천리교가 잠자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교단을 눈을 닦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길 없었던 십 수년 전 10리 밖 20리 밖 심지어 30리 밖에서도 조석근행을 하려고 모여온 교신도들의 수는 실로 5, 6백명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동서고금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불 일듯이 뻗어나간 고성교회의 밑바탕에는 교회장님께서 남모르는 고뇌와 외로움을 안고 한없이 한없이 덕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 숨은 음덕을 생각하니 재삼 위대한 교회장님의 모습이 그리워지며 머리 숙여집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건립한 대한천리교연합회(현 경남교구원남성교회, 그리고 수년 전 우리 교단이 사회의 이해부족으로 왜색 유사종교 단체로서 오인되어 곤경에 놓였을 때, 아무도 몰래 교회장님 단독으로 관계기관을 찾아가서 성진실로서 설득하여 대한민국 천리교를 금일에 이르게 하신 공적, 이런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려고 하면 밤을 새워 얘기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하략)

 

초대회장님의 영결식 (1976415일 부산교구장())때 봉독(奉讀)한 이성권 신흥교회장의 조사(弔詞).

한때 천리교가 왜색 유사종교로 오인되어 교단이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었다. 이때 초대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담판을 지은 적이 있으셨다.

1960년대 초였다. 이때가 이 나라 천리교의 최대 수난기였다. 교단내도 파벌싸움으로 시끄러웠지만, 사회도 꽤나 어수선했다.

국가적으로는 19615·16혁명을 주도한 박정희씨가 196312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1964년은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이 나라 대학생들이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대학생 만여 명이 매일같이 모여 데모를 하는 등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고, 63일에는 서울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연희동에 있는 산을 사서 교단청사를 짓겠다는 마음작정을 하고서 기독교방송국 옆에 터를 고르고 길을 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내무부 훈령이 각 경찰서로 내려졌다.

천리교는 사이비 종교처럼 병을 고친다 하면서 이상한 손짓과 이상한 주문을 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기만하여 금품을 갈취하여 사회를 어지럽히고 말썽을 많이 피우고 있다. 또 해방이 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도 주체성 있는 종교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시정하라.”며 매일같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행위를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하라는 명령과 지시를 내려 경찰서에서 천리교라면 쥐 잡듯이 하는데 놀란 교회와 포교소는 다들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었다.

그때 초대회장님께서 찾아간 곳이 있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국회의원 최 oo(초대 사모님과 친척사이였다)씨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천리교는 사회봉사를 하면서 생명을 갱신시키는 곳이지 세상 사람들을 속이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유사종교단체가 결코 아닙니다.”며 진정서를 올렸다.

평소 고성일대에서 익히 천리교의 훌륭함을 보고 듣고 해서 잘 알고 있던 최 oo씨는 진정서를 가지고 관계기관을 직접 찾아가 그간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하자, 관계기관장은 종교와 정치는 별개니까···.”하며 그 자리에 담당자를 부르더니, “oo, 천리교에서 이제 손을 떼게. 종교문제는 종교인 스스로가 해결해야지 우리들이 개입하면 되겠소.”하며 손 떼기를 권고했다 한다.

그 당시 나도 숨을 죽이며 서울에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초대회장님한테서 서울역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전화연락이 왔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오랜만에 만난 초대회장님이었지만, 안부 여쭐 여유도 없이 하선생, 지금 당장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라. 아마 내일 새벽이면 부산역에 도착할끼다. 그러면 부두에서 충무행 배를 타고서 충무교회장을 찾아가 이것을 오전 11시까지 충무경찰서장한테 직접 전해주라케라.”며 내 앞에 하얀 봉투를 내놓으셨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을 틈도 없이 초대회장님과 헤어졌다. 그 길로 부산을 내려가 초대회장님께서 시키신 대로 충무교회를 찾아갔다.

하지만, 충무교회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문은 박살이 나있고 지붕이며 방문이며 모든 것이 전쟁 중 폭격 맞은 집처럼 엉망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집에 아직도 있겠나 싶었지만, 초대회장님의 심부름이 너무나 다급했던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장님! 회장님! 고성교회에서 심부름 왔습니다.’하고 몇 번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골방 한 켠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누군가 걸어 나왔다. 충무교회장이었다.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며칠이고 계속해서 경찰이 찾아와서는 교회를 부수고 신자들을 가두고 하는 통에 숨어 지냈던 것이다. 그간의 사정을 물을 여유도 없이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뭣고···.”

지금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인데, 충무회장한테 주라며 고성회장님께서 주시던데요. 저도 내용물은 잘 모릅니다. 단지 오전 11시까지 충무 경찰서장한테 직접 전해주라고만 하시던데요.”

그래···.”

나는 그 말만 전해드리고서 바로 고성교회로 왔다.

고성교회는 고성교회대로 난리였다.

천리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잡아가두는 이 난리통에 초대회장님이 며칠이고 교회를 나가서 연락이 없으니 대충 상상이 될 것이다.

고성교회로 들어오는 나에게 초대사모님께서는,

니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고···.”

아무한테도 이 일을 말하면 안 된다는 초대회장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주위에 있는 신자들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충무에서 오는 길인데요.”

회장님이 나가서 소식이 없다. 분명 서울에 올라 간 듯 한데···.”

“···.”

나중에야 따로 조용히 초대사모님을 불렀다.

사모님, 회장님은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소. 안 잡혀 갔습니다. 회장님 심부름으로 충무회장님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면 됐다, 됐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하게도 잡혀 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풀려나기 시작했다. 만일 그때 초대회장님의 그런 용단(勇斷)이 없었더라면···.”

 

냉수목욕

6,70년대만 하더라도 근행을 보러 가는 사람들은 논밭에서 경작한 먹거리 등을, 장날에 물건 팔러 가는 장꾼처럼, 한 아름씩 이고 들고 해서 고성교회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교회에 상주하는 사람만 해도 백 명이 넘었던 교회살림은 언제나 힘들었다. 그래서 초대사모님은 늘 교회식구들을 데리고 전도를 나가는, 그것도 건강한 사람만을 데리고 나가는 초대회장님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들을 데리고 전도하러 나가다가 초대사모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교회에 일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전도를 나간다.’며 그 특유의 잔소리를 해댔다. 그런 초대 사모님의 심정을 모르는 초대회장님은 아니지만, 아침근행이 끝난 뒤면 곧잘 하달필(진전교회 초대선생)씨와 나를 따로 불러서는 지금 바로 밭에 가서 토마토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서 빨리 전도나 하러 가라.”는 엄명(?)을 자주 했다.

이유인즉, 아침을 먹으러 가면 그때부터 초대사모님에게 잡혀 하루 종일 부엌이나 밭일에 끌려 다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들도 교회 사람들에 치여서 초대사모님이 저렇게 정신이 없어 하는데, 시간만 있으면 전도를 나가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을 더 데리고 오라는 말씀에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우리가 있는 곳이 여느 가정집이 아닌 다음에야 교회일을 도울 것이 아니라, 어버이신님의 뜻에 따라 전도·구제를 나가라는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전도를 나가더라도 그때는 참으로 전도할 맛이 났다. 자기만 열심히 하면 아침에 나가 저녁근행에 여남은 사람을 고성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녁근행을 마치면 초대회장님께서는 데리고 온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자의 인연풀이를 해 주었는데, 그것을 같이 듣다 보면 밤 11시를 넘기는 것은 예사였다.

아침근행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지만, 눈을 붙일 틈도 없이 우물가로 가서 양동이 가뜩 물을 퍼 담아 여자 화장실에서 냉수목욕을 했다. 지금처럼 목욕탕이 따로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는 하루에 최소 세 번은 찬물을 끼얹었다.

초대회장님 또한 마찬가지셨다.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교회장이 되고서도 변함이 없으셨다. 더구나 물 좀 퍼 놓으라는 잔신부름을 아랫사람에게 시킬 법도 했지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언제나 여름이든 겨울이든 손수 길어 하셨다.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