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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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년08월][17회]마지막 회

2022.07.29 15:47

편집실 조회 수:123

구제받는 이야기(3)

단노로 모두 구제받는다

 

<끝으로>

지도말씀에는 여러 가지 신상의 고민(질병)에 대해 각각의 깨우침이 있는데, 어떠한 신상에도 통하는 깨우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노입니다.

반대로 단노의 마음이 정말로 다스려진다면 어떠한 신상도 수호받을 수 있습니다.

× ×

단노라는 말은 야마토 지방의 방언을 모체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마토 방언으로서의 단노하다라는 말은 주로 만족하다, 배가 부르다, 지겹다.’라는 의미 외에, 인내, 또는 극복의 의미에 쓰이고 있습니다.

교어(敎語)로서의 단노가 야마토 방언의 단노와 상당히 가까운 듯하지만, 물론 완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교조님께서는 항상 당시 민중 속에서 사용되고 있던 알기 쉬운 말을 이용해서, 거기에 구극의 가르침에 어울리는 의미 내용을 부가하는 방법을 취하셨는데, 이 경우도 똑같습니다.

단노라는 말은 자신의 의욕(意欲)을 즉시 채우려는 요구가 있어서,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사태가 나타났을 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써 사용되었습니다. 즉 거기에는 항상 이 사태에 대해 생각대로 되었으면하는 강한 마음의 투영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사태가 연이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상세하게 분류하면 신상·사정이 되는 것이겠죠.

신상으로 고민하는, 즉 질병에 걸리는 것만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신상의 경우, 특히 단노가 강조되고, 단노는 신상 깨우침의 비장의 카드라는 느낌마저 드는 것도 당연하리라 봅니다.

단노라고 하면, ‘포기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참는 것이라고 혼돈하거나, ‘만족하는 것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있지만, 단노에는 그런 말과 다른 독자적인 맛이 있습니다.

그 유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마음이 가는 곳입니다.

포기나 인내, 만족이라는 것은 모두 자신의 입장을 그저 현재의 위치에 근거해서 바라보고 있지만, 그에 반해서 단노는 자신의 입장을 자신 본래의 기저가 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파헤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존립을 자기 위에만 두려고 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어버이신님을 보는 곳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즉 전자는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씀씀이지만, 후자는 어버이신님의 힘으로 삶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을 납득한 사람, 즉 몸은 대물·차물의 리라는 것을 납득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단노의 마음 씀씀이를 깨우치신 지도말씀 중에는,

각자 저런 몸 같으면 하고 생각해서(1888. 1. 8)

해마다 사정이 있어서 단노.(1888. 3. 27)

세상을 보고 몸은 하나, 단노하지 않으면 안 된다.(1888. 6. 18)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인을 보거나, ‘과거를 보거나, 세간을 보거나 해서 그것들과의 대비 교합에 있어서, 나아가 우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본래 기저로 마음을 되돌릴 때, 거기에, 자연히 진심으로 납득도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리하여 절망한 사람의 마음에도 새로운 생명력이 솟아오르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힘으로 태어나온 것도 아니며, 또 살아갈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어버이신님의 신기한 수호에 의해서만 정말로 가능한 것입니다.

차물의 리에 철저하고, 자칫하면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정말로 삶을 부여받고 있는 기쁨을 알 수 있어서, 단노의 마음이 정해지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마음의 초조함, 마음의 번민은 저절로 흩어지는 것이겠죠.

단노를 강조하면 무위자연의 도를 선택하고, 비극적 인종(忍從)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권하는 것 같이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처절한 노력을 그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의 초조함, 마음의 번민을 제쳐두고, 든든하고 큰마음으로써 더욱 노력해 나아가는 것이 단노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 마음가짐을 차물의 리의 자각에서부터 다시 인정하고, 심화하는 것입니다.

즉 단노란, 임해야 할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단노는 신앙에 의한 새로운 마음의 건축의 기초적인 입장 다지기입니다. 즉 우리들의 신앙의 발걸음이 즐거운 삶의 세계 건축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단노는 그 기초공사이며, 그 재료는 성진실이고, 그 작업 방식은 히노끼싱입니다.

단노는 정지한 것도 아니며, 안주하는 것도 아닙니다. 활발한 신앙의 약동을 품고 큰 진전을 장래에 잉태한 움직임의 기반입니다.

× ×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정말로 단노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인과응보라 할까,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과거의 걷는 방법이 지금 나타나온 경우, 그것은 당연히 마음에 납득이 갈 것이겠죠.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경우보다도,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않은 어려움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마디가 되어 마주 서는 것이겠죠.

또 신앙의 길에 정성을 다하고 다 해도 신상이나 사정의 불화가 나타나서 한 번 정한 마음이 동요할 때도 있겠죠.

그러한 경우, 다스리기 어려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단노는 전생 인연의 참회

, 전생 인연의 참회가 단노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저 현재만의 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과거나 미래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1대 만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혼은 영원히 살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은 결코 금생만의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금생 이전의 생, 즉 전생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생의 인연입니다.

금생의 일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때도 조용히 전생으로부터 다시금 생각해 봤을 때, 과연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는 경우가 많고, 인연 납소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결의와 용기가 솟아나겠죠.

안 되는 가운데 단노하는 것은 정성, 정성은 받아들인다. 안 되는 가운데 단노는 어렵겠지. 하지만 안 되는 가운데 하나의 리는 많은 것을 분별하여 단노. 안 되는 가운데 단노하는 것은 전생 참회, 전생 참회라 한다. 이것 잘 분간해 들어라. 이만큼 깨우치면 자유자재의 리를 알겠지.”(1897. 10. 8)

이 깊은 뜻이 담긴 말씀을 생각할 때, 어떻게 하면 구제받을 수 있을지 잘 알 수 있겠죠.

어버이신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어버이신님의 구제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한 전생 인연의 리를 확인한 신중한 마음가짐인 진정한 단노를 마음에 다스린 사람이겠죠.

단노, 그것은 결코 값싼 자기만족이나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끝까지 밝혀내려는 자기 추구이며, 끝없는 자기 응시이며, 그리고 그 밑바닥에 한 점 꿈쩍도 하지 않는 어버이신님의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 마음의 행정(行程)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져야만 정말로 단노의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 ×

시집을 오자 시어머니가 중풍에 걸렸고, 그 시어머니를 시중드는 것이 불만이어서 견딜 수 없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 며느리에게,

당신의 친정에도 중풍에 걸렸던 분이 없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친정의 조모가 중풍으로 오랫동안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중풍의 전생 인연이 있는 것을 잘 알겠죠. 중풍인 시어머니에게 억지로, 혹은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고 시중을 들어서는 머지않아 당신도 인연이 나와서 시어머니처럼 중풍으로 눕게 되고, 싫어하는 며느리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중풍을 앓아서 나 대신 인연을 다해 주시는 거야. 정말 죄송하다.’ 하고 단노의 마음을 다스리고 시중을 들어보세요.

중풍의 인연을 납소했다고 기뻐할 때가 올 것입니다.”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과연 몇 년 뒤, 그 며느리는 출산 후, 일시적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말끔히 건강해져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왕왕 단노는 자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그렇게 해서는 반쪽짜리 의미밖에 아닙니다.

단노는 또 타인도 하게 해야 합니다.

타인에게도 단노를 하게 한다는 것은 “‘남이 화를 내지 않도록, 남이 싫어하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도록, 또 말하지 않도록.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저 사람이 하는 말은 가시가 없어.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원만해. 저 사람처럼 되지 않으면 안 돼.’라며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뻐하며, 세계가 모두 만족해 주는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단노를 타인에게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겠죠.

그 사람이 자연히 수동적으로 단노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발적으로 어떤 가운데서도 단노 할 수 있도록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자기 개인의 단노에 멈추지 않고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그 감화를 미쳐가는, 타인을 통해 또한 그 자신이 단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결국은 일가(一家), 일국(一國), 세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가운데라도 마음을 쓰러뜨리는 일 없이, 기가 죽는 일 없이, 기쁘고 용솟음치며 걸어 주신 교조님이었지만, 그 행적은 결코 자신만이 그저 현재의 경우에 안주한다는 의미의 단노의 실천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단노의 실천자라는 것을 각인시키듯, 특히 고난 속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부터 몸소 단노의 결실을 보이면서, 스스로 단노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 인류 신인화락의 즐거운 삶을 향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단노와 반대의 마음 씀씀이는 도대체 어떤 마음 씀씀이일까요?

첫째로는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겠죠.

불평불만은 끊는 리, 단노는 잇는 리

라는 우리가 항상 듣고 있는 말씀은, 불평불만과 단노의 득실을 명확하게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걱정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는 것도 단노의 실천에 이어집니다.

미리 심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쓸데없이 불평불만을 하고, 푸념을 늘어놓기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어중간한 마음에 단노를 못한다.”(1907. 4. 9)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충분히 어버이신님께 안겨서 삶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인간 마음이 뭉게뭉게 드러날 때, 그것은 불평불만이 되며, 걱정하는 마음이 되기 쉽고, 단노의 마음이 다스려지기 어려운 것을 말씀하신 것이겠죠.

단노는 마음을 고친 리.”(1891. 1. 30)

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음의 티끌을 털어낸 상쾌한 마음이 되어 분발할 때, 단노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겠죠.

×

천신이나서 만가지 자세함을 일러주며는

온세상 인류들이 용솟음친다

모든인간을 조속히 도울것을 서두르므로

온세상 마음에도 용솟음쳐라

(신악가)

그 인간의 마음이 용솟음치는 것이 구제받는 근본입니다. 용솟음치도록 하는 것이 구제하는 사람의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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